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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ath

글 : 망령                ​​                         분노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매캐한 연기와 화염이 하늘마저 태울 듯 솟구친다. 열기와 잿가루로 가득한 공기에 숨이 막힌다. 본디의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폐허에는 태울 것조차 남지 않았는데도 세계 자체를 불태워 없앨 듯 화마가 몸부림친다. 발밑에서 부스러진 잔해는 사람이었을까, 사물이었을까. 
 이 광경은 나의 기억이 아니다.
 나의 것이 아니다. 나의 꿈이 아니다. 서번트는 꿈을 꾸지 않는다. 

 

 ‘계약하지, 나의 사후를―’
 

 전투도 전쟁도 아닌 일방적인 학살. 암살. 모살. 파괴. 귓전을 때리고 심장을 찢는 비명, 절규, 애원, 저주, 오열, 이것을 없애기 위해 

 ‘나’는 존재한다.
 

 기분이 더러워지는 광경이었다. 아니, 이 불쾌감도 나의 것이 아니다. 불쾌를 넘어서는 혐오, 고통, 자괴감에 무언가가 으스러진다. 짓밟히고 부서진다. 강철처럼 제련된 육신이 아니다. 무너짐을 허락하지 않는다. ‘세계’가 허락하지 않는다.
그 육신 안에서 무언가가 마모된다.

 

 죽음, 죽음, 죽음의 끝에 남은 것은 검뿐인 불모의 땅. 피로 물든 듯, 무덤인 듯 솟은 붉은 언덕. 숨통을 끊는 일격처럼 붉은 땅에 꽂히는 칼날에는―

***

 편의상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아마 이 방의 전 주인, 혹은 주인이 될 인간을 위한 침대 위에 눕혀 두었던 몸을 일으켰다. 인간도 아닌데 꿈자리가 뒤숭숭하다고 몸이 개운치가 않다. 정확히는 뭐라도 패 주고 싶다.
꿈이 아니니 마력으로 이어진 누군가에게 전해 받은 기억이리라.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마스터, 있-”
 

 선객이 와 있었던 모양이다. 마스터의 방 안에서 대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어떻게 그래…….”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에는 물기가 배어 있다. 랜서는 제 주인을 부르던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선을 넘어오면서도 두려워 떨지언정 눈물은 보이지 않았던, 어이없을 만큼 호방하고 넉살이 좋은 마스터였다. 그 마스터가 실더 아가씨 앞에서 울고 있었다. 
 

 “어떻게, 끅, 흐…… 특사 같은 거 안 되려나? 인리를 수복하면, 인류사를 지켜낸 건데 그 수호자를 계속 해야 하냐구…….”
 

 수호자? 여기 있는 서번트 중에 그런 놈이 있었나? 대체 어떤 놈의 기억을 봤기에.
 

 “선배…….”
 

 치미는 울음이 숨을 막는 듯 끅끅거리던 마스터가 제 손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후배’의 얼굴에 눈물 젖은 얼굴로도 웃어 보이는 것은 제가 알던 주인의 얼굴이다. 
 

 “……미안, 놀랐지? 패스가 이어지면 나한테도 기억이 들어오나 봐.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사생활 침해가…… 저, 마슈. 알겠지만 방금 내가 얘기한 건 다른 사람들이나 서번트들한테는 비밀이야. 아처는 말할 것도 없고…….”
 

 기억났다. 칼날에 새겨진 음양의 문양. 그 칼을 쥔 구릿빛 손. 그럼 볼일이 있는 곳은 여기가 아니지.
 

 “야, 나와! 빨간 활쟁이 어딨냐?! 한판 붙어!”
 

 아니나 다를까 놈은 그곳에 있었다. 식당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스태프부터 서번트까지 모두의 시선이 쏠렸지만 식당 문간에 선 랜서는 당당했다. 무엇보다 상대부터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있으니.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오늘따라 개 짖는 소리가 시끄럽군.”
 “허튼 소리 하지 말고 따라 나와라. 식당 뒤집어지는 꼴 보기 싫으면.”

 

 랜서가 으르렁거렸다. 서번트들이야 재미있는 구경거리처럼 둘을 번갈아 보고 있었지만 인간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점점 흉흉해지기 시작하는 분위기를 애써 모른 척하며 숟가락을 놀리던 스태프들의 표정과 손이 굳었다. 차라리 빨리 이 자리를 떠 달라며 애걸하는 눈빛이 자신에게 쏟아져도, 아처는 젖은 손을 수건에 닦고 그 수건을 싱크대에 널어놓고서야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칼데아의 불온한 공기를 눈치 챈 리츠카가 뒤늦게 달려왔을 때는 북적여야 할 점심 무렵의 식당 안은 한산했다. 서번트들과 일부 한가한 인간들은 마스터가 아끼고, 칼데아의 으뜸가는 전력인 둘이 벌이는 희대의 싸움을 구경하러 간 뒤였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식사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던 스탭 몇에게 둘이 향한 곳을 전해 들은 리츠카는 전투 시뮬레이팅 룸으로 향했다.

 

 “랜서! 아ㅊ…… 와, 씨! 이미 시작했어?!”
 

 하필 저 둘이다. 툭하면 싸우고, 제대로 싸웠다간 피해도 만만찮게 키울 만큼 강하기까지 한. 영주가 새겨진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그 손등 위로 갑주를 두른 따스한 손이 내려앉았다. 리츠카가 고개를 들었다.

 

 “세이버, 왜 말리는 거야? 저 둘이 진심으로 싸우면 최소한 둘 중 하나는 나가떨어져서 전력 손실이……!”
 “리츠카도 알게 되었나요?”
 “뭘?”

 

 푸른 눈동자가 붉은 궁병을 가리켰다. 전날 밤의 꿈이 다시 심장을 할퀴고 지나간다. 리츠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마도 리츠카와 연결되면서 랜서도 알게 되었겠죠.” 
 “그걸 어떻게…… 세이버는 알았어?”

 

 무엇을 아느냐 되묻는 대신 기사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리지 않아도 괜찮을 겁니다. 둘은 인연이 있는 사이고, 이런 방식의 대화가 필요할 때도 있으니까요.”
 

 여차하면 자신이 개입하겠다는 듯, 기사왕은 빈손으로 성검을 드는 시늉을 했다. 리츠카는 웃고 말았다. 그러네, 내가 아는 그 이유 때문이면 좀 싸워도 된다. 오히려 조금 속이 시원해질 것도 같다. 피해 규모에는 신경 써야겠지만―  
 

 “……근데 설마 세이버도 구경 온 거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대기 중인 것뿐입니다.”

 

***

 

 전투 시뮬레이터로 장소를 옮겼지만 둘의 싸움은 저쪽에서 볼 수 있고 음성도 마찬가지일 터다. 누구 말마따나 이런 사생활 침해가 없다. 랜서의 손가락이 허공에 룬 문자를 그렸다. 궁병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 손끝을 찔렀다.
 

 “무슨 수작이지?”
 “여기서 하는 말이 저쪽에 안 들리게 하는 것뿐이야. 내참, 이 지랄을 떨고 있을 줄 알았으면 그때 꼭 죽여 줄 걸 그랬지."  

 

 룬 문자를 그렸던 손안에 붉은 창이 나타났다. 그 창끝이 아처를 향했다. 
 

 “안 그러냐, 꼬맹아.”
 

 아처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이내 떠오른 조소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누가 개 아니랄까봐 마스터에게 흘러들어간 기억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었나?” 
 “아하, 지금이라도 죽여 달라고? 얼마든지.”

 

 랜서의 기세가 흉흉해졌다. 그럼에도 태연히, 하지만 응전을 준비하듯 두 손에 쌍검을 투영한 아처가 말을 이었다. 
 

 “무엇을 봤든 상관없다. 그건 내가 아니니까.”
 “애쓴다, 니가 아닌데 내 창의 기억이 남아 있어?”

 

 그야말로 꿈처럼 무질서하고 혼란한 기억들 속에 남아 있던 붉은 죽음의 가시. 못 알아볼 수가 없다. 발아래 쓰러진 아직 미숙한 육신. 미숙한 마술. 그 미숙함으로 제게 맞섰던- 
 어쩌다 이렇게 잘못 컸냐?
 캉! 날아든 창날을 쌍검이 막아내었다. 비죽거리는 얼굴이 코앞이었다. 금이 간 쌍검이 사라지는 만큼이나 다시 나타나는 것도, 그 틈을 기다려 주지 않겠다는 듯 날아드는 창도 빨랐다. 

 

 “옛날 생각 안 나냐?”
 

 서번트로서 다른 전장에 현계했던 때를 말함인지, 아니면 그보다도 더 오래 전의 일을 말함인지. 혹은 다른 클래스로서 만났을 때를 의미하는지―
 쐐액-! 창날을 막는 사이 창의 반대편 끝이 호선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아처가 몸을 물렸다.  

 

 “내가 너무 풀어줬구만, 딴 생각을 다 하게.”
 

 금세 따라붙은 붉은 창날의 공격이 비처럼 쏟아졌다. 전장에 버금가는 살의였다. 붉은 옷자락이 잔상을 남기고 공중으로 떠올랐다. 어느새 손안에 쌍검 대신 자리한 활에서 핑, 하고 시위가 놓여나는 소리와 함께 어느 영웅의 명검을 투영한 것이 날아들었다. 화살막이의 가호가 있는 창병에게는 무용할 공격이었다. 검이 랜서를 스치지도 못하고 땅에 처박혀 폭발하는 사이, 붉은 궤적을 그리며 쌍검을 든 아처가 쇄도했다. 

 

***

 

 모의전을 위한 가상의 공간이라 한들 집과 건물-물론 비어 있다-, 나무와 바위와 풀 따위로 짐짓 인간의 문명과 삶의 터전을 모방하고 있던 곳이었다. 고작 몇 분 만에 초토화되었지만. 재와 먼지로 묵직하기까지 한 공기가 코와 입을 틀어막는다. 그 텁텁한 공기 속을 유영하는 불티가 눈에 들어갈세라 붉은 궁병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광경은 익숙하다. 모든 산 것이 말소된 공간. 고통과 절망과 무력감뿐인. 
 오염된 성배가 저주를 토해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을 불살라 집어삼킬 때일까, 언젠가 내 손으로 빚어 낸 파멸일까. 
움푹 파인 구덩이 안에 누워 올려다보는 하늘은 어이없이 푸르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눈부신 거짓 하늘과 태양. 구원을 바라도 답하지 않았던 신처럼, 거짓 구원을 약속한 세계처럼. 

 

 ‘계약하지. 나의 사후를 맡기겠다. 그 보수를, 여기에 받고 싶다.’
 “―후,”

 

 가당찮은 감상이다. 모의 전투라 한들 전투 중에 이런 잡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전부, 저 창병이 들쑤셔 놓은 탓이다.
 

 “안 일어나냐?”
 

 검고 붉은, 재와 폐허와 화염 속에서 한 자락 푸름이 다가왔다. 랜서는 제가 땅에 처박은 궁병을 내려다보았다. 
 

 “목적은 대련인가, 샌드백이 필요했을 뿐인가?”
 

 솔직히 후자에 가까웠지만. 곧이곧대로는 말할 수가 없어 랜서는 반문하는 쪽을 택했다. 
 

 “네가 ‘왜’를 물어?”
 “과연, 긍지 높은 대영웅께 못 볼 꼴을 보여드린 죄 이 목숨으로 갚으라는 뜻인가.”
 “오냐, 못 죽인 게 한이다. 죽이다 말아서 이런 꼴을 보고.”
 “오지랖이 이렇게 넓을 줄이야. 하기야, 온 얼스터를 혼자 떠안으려거든 그 정도는 되어야 하나?”
 “주둥이 조심해라. 밤새 그딴 거나 보느라 지금까지 기분이 더러우니까.”

 

 아처가 누운 구덩이 가까이에 쪼그려 앉은 랜서가 덧붙였다. 
 

 “최소한 나는, 생전에도 사후에도 내가 한 일에 후회는 안 했다.”
 

 서로 싸우고 싶어서가 아니라 고작 높으신 분들의 사정 때문에 아끼는 벗과 육친 같던 양부와 검을 맞대었을 때조차도, 화가 났을지언정 그 싸움에 후회는 없었다. 창끝이 툭, 툭, 도발하듯 아처의 가슴 위를 건드렸다. 오래된 상흔이 그 상처를 낸 이에게 반응하듯 저려 왔다.  
 

 “너를 그 따위로 키운 인간을 탓했어도 돼, 아니면 그 염병할 썩은 성배를 탓했어도 되고, 남 탓은 죽어도 못해서 결국 화를 낸다는 게 지한테 내고 앉아 있으니. 뭐 하는 짓이냐, 그게?”
 

 자신도 그도 마스터와 지나치게 가까운 것이 독이었다. 너무 많은 것이 마스터에게로 흘러들어갔고, 그것이 다시 저 창병에게로 옮겨 간 모양이었다. 혹은 오래전 심장을 앗아간 인연 때문인가. 어느 쪽이건, 하필 네게.
 

 “그렇다면 나는 너의 분노의 대상이 될 수 있나?”
 “안 될 건 또 뭐냐? 아까도 말했지만…….”
 “네놈이야말로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네가 내게서 본 것이 무엇이라고 고귀하신 빛의 왕자의 심기를 어지럽히느냔 말이다. 언제부터 그렇게 자비로우셨지? 마스터에게 전해진 것을 다시 전달받았을 뿐인 불완전한 편린으로 나를 재단하여 분노할 자격이 네게 있나? 그보다도, 그 분노는 과연 너의 것이기나 한가? 지나치게 사람 좋은 마스터가 나를 동정해 느낀 감정을 네 것처럼 오해하고 있지는―”
 “나불나불 참 잘하는구만.” 

 

 랜서가 아처의 말을 끊었다. 
 

 “원래 멍청한 새끼 하는 짓을 보면 지나가던 아무 멍청이라도 빡이 친다고. 모자란 놈이 지 신세를 지가 꼬고는 심기가 뒤틀려서 삽질이나 하고 있는 꼬락서니를 보고 화가 안 나?”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군. 그 혀로 영령의 좌에 올랐나?”

 

 이 비극을, 이 절망을 끝낼 수 있는 강함을 바라 본 적도 없으면서. 무력감에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던 적도 없으면서.
바닥에 누워 있던 아처의 몸이 사라졌다. 투영한 보구가 날아들었다. 붉은 창이 맞서듯 허공을 갈랐다. 창은 날아오는 검과 정면으로 부딪쳤고, 그 폭발에도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았다.  
 나무 위에서 도약하며 또 다른 검을 시위에 매기던 아처에게로, 창을 뒤쫓는 듯한 속도로 랜서가 뛰어올랐다. 그 손이 게이볼그를 잡아챔과 동시에, 랜서는 지지대도 없는 허공에서 발을 휘둘러 아처를 걷어찼다. 

 

 “그래서 뒈진 뒤를 담보로 힘을 빌려다 쓰니 만족스럽더냐?”
 

 반쯤 무너져 내린 벽에 기대앉은 아처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표정이 대답을 대신했다. 피칠갑을 한 얼굴에 떠오른, 최소한 그 순간에는 진실했을 안도감. 혹은 만족감. 
 아주 기름을 붓는구나. 망할 자식이. 

 

 “뭐 이딴…….”
 

 속이 끓고 눈앞이 어찔하다. 뭐라도 패 주고 싶어 주먹이 근질거린다. 이 감정은 마스터로부터 전해진 것이 아니다. 놈의 것도 마스터의 것도 아니다. 마스터의 것일 수도 있으려나? 알 게 뭐야! 
 랜서의 손에서 붉은 창이 사라졌다. 텅 빈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창만큼이나 날카로운 기세로, 랜서가 아처에게 몸을 던졌다. 
 쾅! 타격음보다는 폭발음에 가까운 소리와 함께 랜서의 주먹이 아처의 뺨에 꽂히며 아처를 다시금 바닥으로 처박았다. 예상치 못한 일격에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이, 아처의 움직임을 제압하려 그 배 위에 올라탄 랜서가 재차 주먹을 치켜들었다. 
 콰작! 아처가 사라진 바닥이 박살났다. 간신히 서 있는 부러진 나무 위로 올라가 활을 겨눈 아처가 입안의 피를 내뱉었다. 

 

 “무슨 변덕이지?”
 

 언제 궁병의 공격이 날아들지 모르는 상황임에도 랜서는 마창을 다시 소환하는 대신 두 주먹을 복서처럼 가슴 앞에 세워 들었다. 붉은 눈동자가 호전적인 웃음을 띠었다.  
 

 “너 같은 건 게이볼그를 쓸 가치도 없다는 것뿐이다. 너도 그 장난감들 내려놓고 덤벼.”
 “자신감이 대단하시군. 영웅은 오만 때문에 죽는다는 소리 못 들어봤나?”

 

 또 다른 명검이 시위를 떠나 날아왔다. 신속의 영령은, 그 검이 제가 있던 자리에 도착하는 것보다도 빠르게 아처에게 다다랐다. 
퍼억! 걷어차인 아처가 잔불이 타는 흙바닥을 뒹굴었다. 몸을 굴려 착지하기가 무섭게 두 번째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가까스로 그 발을 막아낸 쌍검에 금이 갔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

 

 “제정신인가?”
 

 ‘큰 거 한 방’이 터지길 바랐던 호전적인 서번트들은 지루한 소모전-그들 기준에서-에 흥미를 잃고 자리를 뜬 탓에 관객의 규모는 제법 줄어 있었다. 남아 있던 무리 속 어딘가에서 풉, 하고 터지는 웃음을 참는 소리가 났지만 리츠카는 그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 말도 없이 다짜고짜 아처를 끌고 나가 실전 뺨치는 기세로 싸움을 걸었다는 것부터 기절초풍할 일이었는데, 갑자기 룬을 써서 음소거를 시키곤 지들끼리 떠들다가 서번트들 주제에 보구는 갖다 버리고 주먹싸움을 한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럴 때 도움이 될 이라면― 영주가 새겨진 주먹을 불끈 쥐는 마스터를 본 세이버가 재차 만류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죠. 들리지는 않지만…… 입 모양을 보니 아처와 랜서가 아까부터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아니, 그게…… 하긴 보구로 싸우는 게 더 문제겠다. 차라리 저 개싸움이 낫지…….”

 

 관중들 사이에서 또다시 터져 나온 웃음소리는 아까보다도 조금 컸다.

 

**

 

 덩치가 크니 손도 크고 활을 쓰니 팔뚝 힘도 좋아서 주먹도 묵직하다. 게다가 궁병 놈이라 눈도 좋으니 어지간한 공격은 간파해 낸다. 처음 몇 대야 이런 식으로 덤빌 줄은 몰라서 얼떨결에 당한 모양이다. 기껏 날린 주먹이 막히거나 붙잡혀 역공당하기도 몇 번이지만 오히려 싸울 맛이 났다.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나?
 

 “대영웅의 이름은 쿠 훌린이 아니라 창에다 붙여 주었어야 했던 모양이군.”
 “네놈이야말로 입 털 시간 아껴서 주먹 좀 단련하지 그랬냐? 이게 주먹이야, 풍선이야!”

 

 입을 닥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주먹에도 실렸는지 자꾸만 얼굴을 향한다. 놈이 한 걸음 물러나 다리를 차올렸다. 어쭈, 발길질을 해? 발을 어떻게 쓰는지 보여 주마! 
 창병의 허리가 젖혀지는가 싶더니, 손이 발 대신 바닥을 디디며 두 발이 떠올랐다. 랜서의 발끝에 채인 흙이 얼굴에 튀어 아처가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틈에, 넓게 벌어진 랜서의 다리가 휘둘렸다.
 빠각! 소리 끝내준다. 턱뼈 나갔나? 잘 됐네. 한동안 입은 못 열겠지. 랜서는 이기기도 전에 드는 이른 승리감을 곱씹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
 

 진짜로 턱이 나갔는지, 아처는 반격하기는커녕 훌쩍 뒤로 물러나서는 제 턱을 매만져 보고 있다. 덤벼들기에는 꽤나 그림 같은 광경이라고 랜서는 생각했다. 뻘건 예장과 절반이 피를 뒤집어써 뻘건 구릿빛 얼굴하며, 눈두덩이 부어서 크기가 절반이 된 은회색 눈, 털린 이가 없나 확인이라도 하는지 입을 살짝 벌린 채 입 속에서 혀를 굴리는 동작 같은 게 말이지. 
 팟, 아처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미인계에 당했나? 자조하며 랜서는 제 머리 위로 내리꽂히는 발을 붙잡아 집어던졌다. 
 랜서는 서두르지도 않고 아처가 날아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먹잇감과의 거리를 좁히는 맹수와 같은 걸음이었다. 

 

 “―!!”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먼지 속에서 아처가 튀어나왔다. 궁병이라 제 몸도 화살처럼 쏘아 날리는지, 그야말로 랜서를 향하는 육탄(肉彈)이었다. 빨갛고 파란 육신이 뒤엉켜 바닥을 굴렀다.  
 

 “헉, 하아…….” 
 “후…….”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직 마스터 귀에는 안 들어갔나? 영주든 시뮬레이터 강제종료든 개입할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원 없는 싸움을 하게 될 줄이야. 
 몸을 쓰다 보니 오히려 머리가 맑고 차가워지는 것 같다. 신나게 두들겨 줘서? 머리보다 몸이 뜨거워져서? 
터진 입술에서 흐르는 피가 자꾸만 입안으로 스며들자 랜서는 혀를 내어 상처를 눌렀다. 눌린 상처에서 찌릿한 통증이 핏물과 함께 번졌다. 뚝, 얼굴 위로 제 것이 아닌 피가 떨어지자 랜서의 미간에 파인 골이 한층 더 깊어졌다. 

 

 “아, 추저분하게. 자식이.”
 

 랜서의 위에 올라타 두 손목을 내리누르고 있던 아처의 코에서 흐른 피였다. 잡은 손목을 놓았다간 분명 주먹이 날아들 터라, 아처 역시도 혀를 내어 제 코밑을 적신 피를 핥았다. 그 제법 사내다워진 낯짝을 보며 랜서 역시 터진 입술을 핥았다. 피에 젖은 혀가 빛의 왕자의 입술 위를 연지처럼 붉게 덧그렸다. 그 광경에 아처가 아주 잠시 시선을 빼앗긴 사이, 랜서가 아처의 얼굴을 힘껏 들이받았다. 
 

 뻐억! 요란한 소리와 함께 둘의 눈앞에-혹은 머릿속에-번개가 쳤다. 벌게진 이마를 하고서도 랜서가 씩 웃었지만 찰나에 불과했다. 랜서의 이마가 아처의 얼굴에 닿자마자 아처의 무릎이 랜서의 명치에 꽂힌 탓이었다. 
 

 “컥……!”
 

 숨이 턱 막혔다. 가물거리는 시야에 옆으로 기우는 아처의 몸이 보였다. 어떻게 뻗기도 같이 뻗냐? 
 

 징한 연이다. 어느 시대 어느 공간 어느 전쟁에서 다시 만날지 모른다. 그 어느 순간에도 놈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동정 따위는 제게 어울리는 짓이 아니었다.
 

 다만 죽음마저 구원도 안식도 찰나의 휴식도 되지 못할 그 지난한 길에 채여 고꾸라질 돌부리나 되어 줄까, 하는 생각을 까무룩 저무는 머리로 했던 것 같다.

 

***

 

 “정신 들어, 이 멍청이들아? ……아니네, 한 명이네.”
 

 신랄한 목소리와 말투가 익숙했다.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눈동자를 조금 더 굴리면 팔짱을 끼고 선 마스터와, 그 등 뒤의 침대에는 잠든 듯 눈을 감은 푸른 창병. 
 새하얀 천장과 소독약 냄새. 서번트의 몸으로 올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곳이다. 

 

 “……정신이 드냐…고?”
 

 분명히 랜서와 주먹다짐을 하고 있었는데. 서번트가 기절? 언제 와 있었는지, 서번트와 기술팀장을 겸하는 세기의 천재가 아처의 머리맡에서 설명을 덧붙였다. 
 

 “서번트들끼리 주먹질을 했다면서? 재미있는 구경을 놓쳐서 아쉽다만. 리츠카한테 들었지. 보구로 단숨에 마력 소진해서 나가떨어지는 게 낫지, 계속 내버려뒀다가는 2박 3일쯤은 치고 박을 것 같다지 뭐야. 그래서 칼데아에서 제공하는 마력을 줄였어. 현계 유지만 가능할 수준으로! 물론 마스터의 지시였고. 단독행동 가능한 클래스라 그런가 깨기도 먼저 깼네?” 
 “마력 동나는지도 모를 줄은 몰랐다, 정말. 역시 천천히 줄이지 말고 셧다운을 했어야…….”
 “어허, 그러다 잘못하면 현계에도 지장 생긴다니까? 하여간, 마력 공급도 재개했고 한 명은 깼고, 랜서도 곧 깰 테니 이 몸은 이만.”
 “응, 이따 봐- 그리고 있지. 아처.”

 

 입을 열기 전, 다시금 잠든 랜서 쪽을 확인한 리츠카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둘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까진 모르겠지만 말해 둬야 할 것 같아서. 나는 너를 동정한 적이 없어. 그냥, 꿈을 꾸면서…… 그 감정을 내 것처럼 느꼈을 뿐이야.”
 

 그럼 그 분노는 정말로 그의 것이었나. 누군가 저로 인하여-저를 위하여 노하는 일이 얼마 만인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아처는 그저 실없이 웃고 말았다. 리츠카가 마주 웃었다. 
 

 “웃는 거 보니까 좀 살만한가 보네. 갈게. 그리고 랜서 깬 뒤에 둘이 같이 나 좀 봐?”
 “잠깐, 마스ㅌ…….”

 

 닫히는 의무실 문 사이로 금빛 눈동자가 형형했다. 진정한 분노는 이제 시작이었고, 아처는 그 분노를 함께 맞아 줄 옆자리의 푸른 창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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