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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igence

글 : 알트 / 그림 : 김뀨​​                        근면

 2주. 무슨 일을 하느냐에 따라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지만, 애인을 만나지 못한 기간이라고 한다면 꽤 긴 시간이었다. 그게 서로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고 서로의 발걸음으로 몇 분 남짓이면 도착하는 거리라면 더욱.

 

 랜서는 언제나 바빴다. 대부분 하루를 가득 채운 아르바이트 일정 때문이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일정 탓에 아처와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주 가끔 그에게 빈 일정이 생길 때면 아처 쪽에서 시간을 낼 수 없었고, 그렇게 계속 어긋나다 보니 그의 얼굴을 전혀 보지 못한 채 무려 2주나 지나버리고 말았다.

 

 1주까지는 버틸 만 했지만 2주가 다 되어가자 하루 종일 랜서만 생각하고 허덕였다. 지나가던 푸른빛만 봐도 랜서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는 것도 수차례였고, 키가 비슷한 사람만 봐도 멈춰선 채 시선이 이끌렸다. 오죽 그가 보고 싶었던 건지. 아처는 키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지나가던 길가메시를 보며 반가운 표정을 짓는 자신을 눈치채곤 상태가 심각함을 깨달았다. 영웅왕의 일그러진 표정과 더불어 지나가던 에미야 시로의 당황한 시선까지 겹쳐, 서먹해진 공기가 어찌나 싸늘했는지. 그 장소가 공공장소인 걸 잊고 무기를 꺼낼 뻔할 정도였다. 그 상황을 다시 체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랜서가 필요했다. 그가 보고 싶었다. 예상하지 못했을 때 마주쳐 곤란해할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지금 당장 쾌활한 웃음소리와 호탕한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랜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후련해지고 생각을 정리할 틈이 생겼다. 그게 이성을 되찾았다는 뜻은 아니지만. 이 시간의 랜서는 어디에 있더라. 아르바이트는 자주 다니나, 한 곳에 진득하게 있던 적이 없으니 어디에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저번에는 찻집, 꽃집. 생선가게에서도 봤었고 웨이터 일도 몇 번 했었지. 그러나 그가 일했던 장소를 하나하나 따져도 있을 만한 곳이 떠오르진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했던 아처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높은 빌딩 위에 서서 후유키 시의 온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처 클래스의 천리안은 사람이 우글거리는 신토역 앞에서도 푸른 머리카락이 없다는 걸 구분하는 건 물론, 그가 지금까지 일했던 가게에 그가 없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에 있는 걸까. 

 

 눈을 굴리며 후유키 곳곳을 샅샅이 뒤지던 아처는 후유키 대교 근처에서 시선을 멈췄다. 자신의 기억 속엔 없는 완전히 낯선 카페가 거기 서 있었다. 저런 곳에 카페가 있었던가. 고개를 기울이는 것도 잠시, 그러고 보니 린이 요즘 수상한 카페가 있다며 의심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기도 한다 그랬던가. 아처는 린이 말한 그 카페가 저 카페라고 생각했다. 랜서가 있는지 확인할 겸 린의 수고를 덜어주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결코 그를 쫓아다니는 게 아니다. 정찰 일부다. 아무도 묻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데 저 혼자 중얼거리며 마음을 달랬다.

***

 가까이에서 본 카페는 수상하다는 것치곤 번듯한 카페였다. 잘 다듬은 식물들과 깔끔한 외벽이 잘 어우러져 괜찮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카페. 짧게 설명하자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수상한 카페에 들어가기에 앞서, 문 앞에 서서 잠깐 마음의 준비를 한 아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여느 카페에나 있는 짤랑거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다소 귀에 거슬리는 소리에 가볍게 얼굴을 찡그린 아처는 이어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표정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렸다.

 

 “어서 오세요~”

 

 목소리는 익숙하지만, 말투는 낯설었다. 어울리지 않는 존댓말로 반기던 랜서는 아처를 보고 의아한 듯 눈을 깜빡였다.

 

 “네가 웬일이냐?”

 

 애인에게 웬일이냐니. 동네 강아지를 맞이할 때보다 못한 태도에 불만 가득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그러나 랜서는 화살막이의 가호로 튕겨내는 것처럼 차가운 눈빛을 무시하며 구석에서 앞치마 하나를 꺼내 아처에게 던졌다. 

 

 “이야, 마침 좋을 때 와줬네. 어이, 아처. 좀 도와줄래?”
 “뭐?”

 

 앞치마를 받자마자 둘러보던 아처는 이어지는 랜서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아까는 웬일이냐고 그러더니 갑자기 도와달라고? 대체 무엇을 말이지?

 

 “주방장이 갑자기 쓰러졌거든! 그렇다고 내가 하려니까 세세한 요리는 귀찮아서 못한단 말이지.”

 

 그러니까 그의 말을 제대로 요약하자면, 요리를 해달란 소리였다. 보고 싶었다는 말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2주 만에 처음으로 애인 얼굴을 보자마자 한다는 말이 노동력으로 써먹겠단 소리라니. 상식 밖의 소리에 아처는 손으로 이마를 짓누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싫냐?”
 “당연하다. 내가 그런 일을 도와야 할 이유가 전혀…….”
 “오늘 일 빨리 끝내면 3일 휴가 준다던데?”
 “당장 주방으로 안내해라.”

 

 에미야 시로를 놀릴 때처럼 헤헹, 하고 웃는 랜서를 보고서야 미끼를 신나게 문 물고기가 됐다는 걸 알았지만, 랜서가 정말로 3일 휴가를 받는다면 뭐든 상관없었다. 그런 거짓말을 할 남자는 아니니.

 

 랜서를 따라 들어간 주방은 주방 구실을 그럭저럭 갖추고 있었다. 사용한 흔적은 남아있으나 깔끔하게 정돈된 조리도구들, 넉넉하게 식재료를 담을 수 있는 식당용 냉장고는 물론, 빵도 매장에서 직접 굽는 모양인지, 희미한 버터 향과 열기가 남아있는 오븐이 구석에 놓여있었다. 

 간단한 요리라면 상관없겠지. 아처는 앞치마를 가볍게 두르고 도구들을 사용하기 좋게 챙겨 들었다. 이런 특이한 카페에서 주문하는 사람도 몇 없을 테니. 그러나 아처는 랜서가 건네준 메뉴판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안일한 선택을 한탄했다.

 

 “딸기 파이 하나!”
 “에스프레소 한 잔!”
 “카레, 뭐? 이 카페에서 카레도 했었나? 아무튼 카레 하나!”
 “메뉴판에도 없고 직원도 모르는 메뉴는 대체 왜 받는 건가!”

 

 이 카페의 메뉴는 대체 얼마나 있는지, 가짓수도 다양하고 종류도 통일되지 않아 눈이 핑핑 돌아가는 수준이다. 잘 익은 딸기를 설탕과 함께 졸여내는 동시에 돼지고기를 가볍게 볶고, 커피 원두까지 골라내야 했다. 폭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밀려 닥치는 주문량은 영령조차 지칠만한 수준이었다. 커피를 포함한 각종 음료와 파이, 온갖 식사류, 쓰러지기 전까지만 해도 이 모든 걸 혼자서 다 해냈다는 주방장의 실력이 감탄스러웠다. 기회가 된다면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군. 피로감에 물들어 제정신이 아닌 아처는 홀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어 이어 들어온 주문을 확인했다.

 

 “사과 파이.”

 

 양식을 지켜서 칸에 제대로 써넣으라고 잔소리를 몇 번이나 해도 꿋꿋하게 제멋대로 휘갈겨 쓴 글자는 그가 쓴 것치곤 꽤 단정한 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엉망이지만. 엉망인 글자마저 왜 사랑스러워 보이나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몇 초 정도 더 종이를 바라보다가 선반 아래 상자에서 사과를 꺼냈다. 빨갛게 잘 익은 단단한 사과를 물로 깨끗이 씻어내고 바로 과도를 들어 얇은 껍질을 미끄러지듯 깎아냈다. 끊어지지 않고 벗겨지는 껍질의 흔적은 낭비되는 과육 한 조각 없이 완벽하게 이어졌다.

 

 “과일도 잘 깎네.”

 

 랜서에게 어쌔신 클래스 적성이 같이 있어 기척 차단을 가지고 있던가, 아니면 아처가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슬그머니 다가왔거나, 어느새 아처 옆에 다가와 그의 솜씨를 구경하던 랜서는 내내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오늘 주문이 좀 많네!”
 “……칭찬은 고맙지만, 랜서. 다른 할 말이 있을 텐데.”
 “화났냐? 미안미안.”
 “…….”

 

 보고 싶었다거나, 갑자기 일을 시켜서 미안하다거나, 그런 말을 기다렸던 아처는 랜서의 매우 가벼운 반응에 냉랭한 반응을 유지했다. 고대인에게 지극히 상식적인 선을 바란 건 아니나, 상상 이상으로 느슨한 태도에 기껏 한 사과를 받아주고 싶지 않았다. 칼이 도마에 닿는 소리 나게 사과를 절단하고 팬에 쏟아부은 아처는 랜서를 완전히 외면했다.

 

 랜서는 아처의 반응에 멋쩍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화나게 해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랜서에게 진심으로 화가 나면 반대로 재앙의 혓바닥을 완전히 봉인하고 냉정해지곤 했다. 그런 그가 지금 이러고 있다는 건 어느 부분에서 아처가 제대로 화가 났단 뜻이었다. 이럴 때 좋은 방법이 있지. 주변을 눈길로 확인하던 랜서는 슬쩍 아처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아처.”

 

 아처가 고개를 돌리자 보인 건 메뉴판으로 얼굴 옆을 가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랜서였다. 그는 접근을 멈추지 않고, 금세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천리안을 사용하지 않고도 랜서의 푸른 속눈썹이 보인다 싶었을 때, 아처는 입술에 부드럽게 앉았다 떨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가볍게 맞닿은 입술은 그의 민첩 랭크가 무색하지 않게 순식간에 떨어졌다. 닿았다는 감촉도 거의 없는 순간적인 일이었으나 아처는 입술에 분명하게 남은 희미한 체온을 느꼈다. 그 감각을 느꼈을 때, 당황해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방금 키스한 건가?

 

 “랜서, 방금…….”
 “뒤는 오늘 밤에 이어서 하자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히죽거리던 랜서는 손님의 호출에 발랄하게 대답하며 그쪽으로 종종 뛰어갔다. 꼬리 같은 푸른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멀어지는 모습을 보던 아처는 팬의 열기보다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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