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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uttony

글 : 휴지                ​​                         폭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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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처는 눈앞의 난장판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 둘, 셋, 넷. 정신을 잃고 널브러진 다섯번째 남성의 목덜미에 허겁지겁 달라붙어 있던 남자의 푸른 꼬리가 그 한숨 소리에 흠칫 흔들리는 게 훤히 보였다. 어찌나 깔끔하게 먹고 있는지 천천히 돌아보는 얼굴 위에 붉은색은 그의 눈동자밖에 찾을 수 없었다. 주변에는 은폐와 사람을 물리는 룬으로 가림막이 되어있는 것이 다행히 골목이라곤 하나 개방된 장소라는 건 인지할 정도로 제정신인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마치 네가 왜 여기에 있냐는 듯, 당혹으로 떨리는 눈동자가 그 증거였다.

 "너…. 내가,"
 "오해야! 아처!"
 "… 호오? 대체 무엇이 오해인지 자세히 설명할 수 있나, 랜서?"

 식은땀을 흘리며 다급하게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는 랜서의 모습에 아처는 수려하게 미소지었다. 오, 이건 좀 위험한데. 아처의 미소에 안색이 창백해진 랜서는 여전히 정신을 놓고 있는 남자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물론 목덜미에 뻥 뚫어놓은 구멍 두 개를 없애기 위해 치유의 룬을 새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연비 나쁘다고, 마력 아깝다고 온갖 쓴소리를 해대며 대신 조처를 했을 그가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으니 자신의 힘으로 해야 했다. 안녕, 내 귀중한 마력아. 기껏 채워놓은 배가 다시 공복을 호소하는 것에 랜서는 마음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마력도 소중하지만, 지금은 장래의 식사 사정을 위해 현재의 위기를 헤쳐나가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까.

 

 "아처. 이건 내가 먼저 습격한 게 아니야. 방 안에 계속 있기 심심하고 힘들어서 나왔는데…. 저놈들이 먼저 습격한 거야."
 "그렇군. 그래서?"

 

 야 정색하지 마.
 

 랜서의 입가의 근육이 절로 경련했다. 대체 아처는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건가. .. 하긴, 화낼 수도 있긴 하지. 아처가 랜서와 동행하면서 피를 제공하는 대신 랜서는 더는 아무도 해치지 않기로 약속했었으니까.

 

 랜서는 흡혈귀이다. 과거 흡혈귀 중에서는 굳이 식사를 위한 흡혈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10년 전 모든 것이 변했다. 그가 후유키영지에서 지키고 있던 봉인이 풀렸던 것이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오염된 원망기를 재봉인 하는 일에 참여했던 랜서는 저주를 받았고, 그 결과 만성적인 마력 부족과 끝없는 공복, 흡혈 충동으로 인해 피를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이후 저주를 풀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그사이 종종 너무 배고픈 나머지 이성을 잃고 일을 저질러버려 현상수배 되고 말았다. 이에 덩달아 일족들에게까지 추격당하기 시작했다.
 

 온갖 인간과 비인간에게 쫓기는 데다 배는 고프고, 마력은 끝없이 새는 최악의 삼박자에 반 이성 없는 상태에서 랜서는 아처와 만나게 되었다. 당시 산속까지 도망쳐 들어왔던 랜서는 처음 맡는 맛 좋은 향기에 이끌려 인근의 산촌으로 내려가 호위로 마을에 들어와 묵고 있던 아처를 습격했다. 간만에 먹는 농도 짙은 마력과 어느 때보다 차오르는 포만감 덕분에 몹시 오랜만에 이성을 찾았던 랜서는 잠깐 사태를 이해하지 못해 상황정리를 하던 중 자신을 추적한 아처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한창 본능이 일하고 있을 때는 도망쳤을지도 모르지만, 제정신의 그는 오랜 허기로 반복되는 정신적 기복에 지쳐있는 상태였었다. 뭐 오래 살았으니 죽어도 괜찮지 않을까, 간만에 배부르게 먹었는데 지금 죽으면 때깔 곱게 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벼운 감상이 랜서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래서 당시 랜서는 선뜻 아처에게 목을 내주었다. 간만에 맛난 마력을 대접해준 감사함도 있었지만, 어쩐지 이 녀석, 아처에게 죽는 것은 괜찮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랜서의 말에 당황하던 아처는 마음속에 어떠한 바람이 불었던 것인지, 그에게 동행제안을 했다. 처음엔 자신의 편의만 잔뜩 봐주는 제안이 수상하여 거절했지만 아처의 간곡한 부탁 교환조건의 조율로 결국 수락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때 아처의 제안 덕분에 랜서는 저주받은 제2의 삶을 어느 정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아처와의 동행은 생각보단 심심하지 않았고, 편안했다. 수배 탓에 헌터들이 심심할 틈을 주지 않은 것도 있으나, 10년간 그를 따라다녔던 형용할 수 없는 허기와 고독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컸다. 물론 서로 처음의 동행이었기에 삐걱거리는 것도 많았지만 어떻게든 맞춰나가기 위해 서로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 덕분인지 빠르게 가까워진 두사람은 서로의 표정을 보고 간단한 의사를 알 수 있는 경지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런 랜서의 감이 외치고 있었다. 여기서 잘 변명하지 않으면 당분간 제대로 된 식사는 없다고.

 

 랜서는 너무 억울했다. 잠깐 기다리라며 훌쩍 사라져버린 아처는 돌아오지 않지, 설상가상으로 랜서 전용 비상식량도 떨어져서 쫄쫄 굶을 수밖에 없었지. 3달 전의 자신이었다면 좀 더 참을 수 있었겠지만, 규칙적인 식생활에 길들여진것인지 하루 이틀 굶었을 뿐인데 배가 너무 고팠다. 이놈의 허기 때문에 밖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셀프 감금 생활까지 해야 했던 랜서는 너무 억울했다. 보통이면 도착했어야 할 연락까지 오지 않으니 오늘은 별수 없이 그를 찾으러 나왔던 것인데…. 하필이면 거기서 운 나쁘게 길거리 깡패들이 랜서를 만나서 돈 내놓으라며 그의 앞길을 막았던 것이다. 그래서 랜서는 먼저 폭력을 행사한 깡패놈들에게 정당방위로 주먹을 휘둘렀고, 돈을 빼앗으려고 했으니 배고픈 김에 정당방위로 피를 약간 받아가기로 했다. 
 

 아니 정당방위면 그럴 수 있지 않나? 싶지만 아처의 모습을 보아 그럴 수 없나 보다. 랜서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연장자로서 넓은 마음으로 인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은 내 잘못이다. 어른답게 참지 못한 내가 잘못했나 보다. 그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내가 잘못한 게 맞지. 랜서는 열심히 자기 자신을 합리화했다. 그리고 최대한 반성하는 표정을 만들어 보였다.

 

 "미안."
 "뭐가?"
 "저쪽에서 먼저 시비 걸긴 했지만 그렇다고 약속을 어겨선 안 되었는데…."

 

 그렇게 말하며 랜서는 샐쭉하니 고개를 숙이고 살살 아처의 눈치를 봤다. 그런 랜서를 보며 아처는 깊은 한숨을 내쉬어, 아니 한숨을 내쉰다고? 내가 기껏 사과하는데? 랜서는 욱하고 올라왔지만 배고프다고 징징대는 뱃속을 위해서라도 꾹 참아냈다.
 

 좀생이, 정당방위 정도는 봐줘야 하는 거 아니야?
 

 물론 마음속으로는 참지 않고 다양한 불평불만을 했다. 하지만 곧 아처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하게 되었다.

 

 "사역마를 받지 못했나?"
 "아니? 웬 사역마? 못 받았는데? 그러니까 내가 여관에서 나오지 않았겠냐?"

 불만스레 툭 튀어나오는 랜서의 말에 아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아처는 하루 전 의뢰 기간이 연장될 듯 하여 랜서를 부르기 위해 사역마를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랜서가 늦어 걱정돼서 급히 일을 취소하고 돌아왔더니…. 사역마를 어딘가에서 가로채인 것이 분명했다.

 

 "돌아가지. 도시를 나가야겠다."
 "그래."

 

 랜서 또한 어떠한 상황인지 파악했다. 아처가 아무리 반푼이 마술사라 해도 자신의 사역마에게 일어난 일에 반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처보다 높은 마술 실력을 갖춘 헌터이거나, 아니면 랜서를 쫓는 다른 세력일지도. 골치 아프게도 랜서를 쫓는 자들은 헌터뿐만이 아니다. 어느 쪽이든 좋지 않았다. 황급히 골목에서의 흔적을 지우고 여관으로 향하며, 아처는 사역마에게 연결되어있던 패스를 끊었다. 이곳까지 이미 추적된 것은 뻔하고, 바깥에서 진을 치고 있는지도 몰랐다.

 

 여관에 오자마자 프론트로 향하는 아처를 뒤로하고 랜서는 방으로 돌아와 황급히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오래 머물 예정이었지만, 여행자의 신세였던 버릇에 풀려있는 짐은 얼마 없었다.

 

 꼬르륵-

 

 랜서는 짐을 챙겨 방을 나서려던 중 크게 울리는 뱃소리에 자신이 아직 제대로 밥을 먹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조금이나마 회복했던 것도 아까 흔적을 지우고 자리를 뜨면서 사용해버렸으니. 잊고 있던 배고픔이 서서히 올라오는 느낌에 랜서는 그 자리에서 웅크렸다. 너무 배가 고팠다. 최대한 체력과 마력을 온존하려던 아처에겐 미안하지만 나가기 전에 식사할 필요가 있었다. 

 

"랜서 이제 슬슬 나가야…!"

 

 쾅-  방으로 가까워지는 먹음직한 향기에 기다리던 랜서는 아처가 방안에 들어오자마자 신속의 움직임으로 닫힌 문에 그를 밀어붙였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아처는 무의식적으로 목덜미를 노리고 다가올 랜서의 얼굴을 손으로 막으려 했지만, 그의 행동을 예상이라도 한 듯 랜서는 곧 진로를 바꿔- 아처의 입에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

 

 아처의 어깨를 붙잡는 차가운 손과 달리 닿아오는 랜서의 혀가 뜨거웠다. 훅 올라오는 미지근한 열기에 짐짓 화난 듯 아처는 눈앞의 붉은 눈에 눈을 맞추고 노려보았지만, 랜서는 승리감에 눈꼬리를 휘며 좀 더 보채듯 가지런한 치열을 쓰다듬었다. 

 

"랜서 잠,"

 

 분명한 유혹하는 행동에 멈칫했던 아처가 저항하려는 손을 잡아채고 틈을 노려 더욱 깊이 파고든 랜서는 입천장을 쓸어내리고, 거부하는 그의 살덩이를 얽어 자신의 안으로 맞아들였다. 와작- 짐승 같은 입맞춤에 얼핏 황홀하게도 느낄 수 있었을 순간이었지만 터져 나오는 통증과 비릿한 피의 맛에 아처는 눈을 찌푸렸다. 요구사항이 분명했다.
 

 각종 산해진미를 음미하듯, 랜서의 붉은 눈은 간만의 식사에 심취해있었다. 굶주린 그의 행태에 아처는 잠시 고민했으나 타액, 혈액과 함께 마력까지 호로록 빨아가려는 기세에 어떻게든 다시 랜서를 떼어놓기 위해 몸부림쳤다.

 

"응응…!"
"읏, 잠깐, 랜서!"
"좀 더, 그엑!"

 

 촉, 하는 아기자기한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두사람 사이에 연결된 실이 붉다. 아쉬워서 다시 달라붙으려는 랜서의 뒤꼬리를 잡아당겨 저지한 아처는 잔뜩 핥아지고 씹힌 입술을 소매로 닦아냈다. 점점이 소매를 물들이는 빨강과 입안의 통증과 가득한 쇠 맛으로 보아 이번에도 제대로 물어뜯은 모양이었다. 소매에 묻어나오는 붉은 점을 함께 내려다보는 랜서의 눈빛이 몹시 아쉽고 불만스러워 보였다. 랜서가 어느 정도 진정되었을 때 즈음에야, 아처는 그를 놓아주었다. 

 

"좀 진정해.."
"진정했어, 미안. 그런데 더 먹으면 안 돼? 나 3일 동안 굶었다고."
"저번에 만든 걸 벌써 다 먹은 건가?"
"음…."

 질문에 대한 답이 천장에, 바닥에 새겨지기라도 한 듯 입술에 남은 혈액을 할짝이며 시선을 피하는 푸른 모습이 밉살스럽다. 어쩐지 간식처럼 하나씩 까먹는다 싶더니…. 아처는 장래 겪을 예정인 빈혈에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꼈다. 랜서에게 주는 전용 비상식량은 아처의 혈액을 틈틈이 마력으로 굳혀 정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식사를 제공하겠다는 조건으로 시작된 관계였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일을 대비해 만들어 주었던 것이건만. 아무래도 식사전략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적당히 먹이고 출발해야 했다. 지금도 포위망을 좁혀 들어오고 있을 테니.

 

 "후우… 적당히 먹어라. 나가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쳇, 알고 있다고"

 짜증스럽게 말하면서도 랜서는 아처에게서 한걸음 물러났다. 아처는 랜서가 물러난 것을 확인하고 셔츠를 두어개 풀기 시작했다. 채 아물지 않은 이빨 자국과 함께 탄탄한 어깨가 어둑한 조명 아래 드러났다. 그 모습을 랜서는 군침을 삼키며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안광이 쏘아져 나올 것 같은 시선을 보내면서도 차분히 기다리는 모습이 마치 훈련을 잘 받은 개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아처는 애써 표정을 감추고 고개를 기울여 먹기 좋게 목을 내주었다.

 

 "이리와, 랜서."

 

 아처에게서 떨어진 허락의 말에 곧장 기다렸다는 듯 와락 안기는 몸이 전에 비해 힘찼다. 투둑-  두꺼운 살을 뚫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처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통증을 목 안으로 삼키고 금방이라도 떼어낼까 꼬옥 달라붙는 랜서의 푸른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그 손길에 긴장하던 랜서의 몸이 조금 풀리는 게 맞닿은 몸 너머로 느껴졌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 10년간 잃어버린 것의 무게가 아처의 마음을 짓눌렀다.

 

 10년 전, 아처는 후유키에서 일어난 대재해의 불길 속에서 유일하게 생존하였다. 그러나 악한 마력을 품은 불길은 아처 한 명의 목숨을 놓치는 대신 기억도 색도,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붉은 세상의 악몽과 푸른 빛을 제외하고.
 

 꿈속에서 자신을 구하던 푸른 그가 실존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성인식을 치른 뒤, 후유키영지를 떠난 여정 속에서 그를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스승이었던 그, 쿠훌린을 다시 만났을 때 쉽지 않은 여행을 해내게 해준 모든 우연과 인연에 감사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넓은 세상에서 이렇게 다시 그를 만나기는 어려웠을 테니 말이다. 추적해 들어간 산촌의 계곡에서 처음 마주쳤던 그 날 나무 그늘 아래 반짝이는 푸른색을 인지하였을 때, 아처의 안에서 끓어 넘쳐 오를 것 같았던 열기를 그는 평생 알지 못하겠지.

 

 아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지 않는 다른 손을 허리에 돌려 끌어안았다. 자신의 안에서 빠져나가는 생명의 양과 반비례하여 강해지는 품 안의 존재감에 아처는 안도감과 함께 자신 안의 무언가가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렵게 찾은 그는, 쿠훌린은 여기에 잘 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다시는 놓지 않을 것이다.

 

 … 하지만 부족하다. 그거론 부족해. 좀 더, 좀 더 그가 자신에게서 떠나지 않을 무언가가 필요했다. 
 

 아처의 눈이 밤의 조명 아래 어둡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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