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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ity

글 : 코코 / 그림 : 덕개​​                       자선

 ‘짤그랑’

 “감사합니다!”

 동전이 양철통 속으로 추락해 구르는 소리, 누군가의 작은 자선을 반기는 밝은 목소리와 함께 꾸벅 숙였다 올라온 머리를 따라 파란 머리카락이 강아지의 꼬리처럼 살랑살랑 흔들렸다.

 하늘은 파랗고 맑음, 구름 조금, 가끔 벚꽃 잎이 눈송이를 흉내 내며 팔랑팔랑 떨어지는 4월. 

 후유키 교회의 바자회 겸 전시회가 한창인 근저의 작은 공원은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다. 

 

 “아처 이것도 부탁해”

 

 멍하니 랜서의 머리카락의 궤적을 쫓고 있던 시선을 내려 린이 내민 골동품 항아리를 받아 든다. 

 

 이곳저곳에서 접객 아르바이트를 하던 가락이 헛것은 아닌지 빨간 양철 모금함을 들고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말을 걸면 대부분의 사람이 마주 웃으며 지갑을 꺼내 동전이나 지폐를 집어넣는다. 그리고 그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매우 익숙하다.

 

 린에게 건네받은 낡은 항아리를 보고 있는 시선을 따라오지 못한 채 파란 남자에 대해  생각하던 사고를 억지로 돌려 손에 쥔 골동품에 집중한다. 

 

 오늘의 바자회는 후유키 주민들의 다락이나 창고에 잠자고 있던 잡동사니나 골동품들을 기부받아 그것들을 팔아 얻어지는 수익과 랜서의 손에 들려 있는 모금함에 모이는 자선금으로 불우이웃 돕기를 위해 성당교회가 주최한 이벤트 - 시스터 카렌 오르텐시아가 일꾼으로 보낸 랜서와 지역의 관리자로서 참가한 린과 린에게 동원된 아처, 그리고 몇몇 지원자의 봉사로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6천 원.”

 구조의 해석을 마치고 입에 올린 금액을 써 붙이기 위해 펜을 집어 든다. 

 

 린이 다른 물건들을 뒤지다가 고개를 들어 저를 쳐다보았다. 

 “꽤 진품 같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아니었나 봐?”

 깔끔하게 또박또박 금액을 적은 표를 항아리에 붙이고 린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준다. 

 애초에 이런 바자회에 무료로 기부되는 물건에 진짜는 거의 없다. 

 하지만 잘 만들어진 가짜라도 누군가의 거실에서 누군가의 눈을 기쁘게 해 준다면 그 정도의 가치가 있겠지. 검은 옻칠이 된 바탕에 분홍 꽃잎 장식이 점점이 찍혀 있는 항아리를 판매대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오~ 이거 괜찮은데?”

 어느새 다가온 파란 남자가 항아리를 집어 들더니 손안에 휙휙 돌려 이리저리 들여다본다. 

 “근데 너무 싸게 붙인 거 아냐? 이렇게 이쁜데 공 하나는 더 들어가야 할 거 같은데?”

 “표면의 결이 균등하지 않고 꽃잎 무늬도 선이 어그러진 부분이 있다. 애초에 무상으로 기부받은 것이니 과도한 금액을 붙일 수는 없지.”

 “딱딱하기는.”

 입을 삐죽 내밀고 볼을 부풀리는 표정이 너무 어리고 무방비해 보여서 급히 시선을 내려 항아리를 쓰다듬고 있는 길고 하얀 손가락 본다. 

 “아.”

 그리고 그렇게 그 하얀 손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랜서가 항아리를 판매대에 돌려놓던 중 미끄러지듯 그 손가락을 벗어나 소리 없이 추락하는 항아리를 타이밍 좋게 잡을 수 있었다.

 순간의 일이었다. 붙잡은 항아리를 다시 안전하게 판매대에 올려놓으며 랜서를 보자 그도 당황한 듯 손이 미끄러졌다느니 항아리 캐치 실력이 좋다느니 헛소리를 늘어놓다가 아무 말 없이 쳐다보고만 있자 머쓱한 표정으로 모금을 마저 해야겠다며 파란 꽁지를 휘날리며 다시 멀어져 간다. 

 

 항아리가 떨어지는 순간 그 손가락을 보고 있어서 알 수 있었다. 랜서 정도 되는 남자가 그렇게 쉽게 물건을 실수로 떨굴 리가 없었다 - 그 한순간 랜서의 손가락은 마치 노이즈가 낀 영상처럼 흐릿해져 있었고 그것은 곧 실체화가 불안정해질 정도로 마력이 바닥을 치고 있다는 뜻이었다. 

***

 순간 아- 실수했네 하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떨어지던 항아리를 재주 좋게 캐치해 테이블에 올려놓으면서 이쪽을 보는 궁병 놈의 미간에 깊이 파여있는 주름을 보고 이놈 이거 눈치챘네~ 하고 두 번째 한숨. 

 

 요즘 마력 운영이 빠듯해서 신경 쓰고 있었는데 하필 눈매 날카로운 궁병 앞에서 실체화가 삐끗하다니 지지리 운도 없지. 

 

 일반인이라면 그런 찰나의 흐트러짐 따위 눈치채지 못했을 텐데 아처는 영령인 데다 눈 빠른 궁병이니 이건 이미 뭐라 변명해도 마력 여분 갈당갈당하다고 쩌렁쩌렁 광고 때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반응을 보려고 대충 너스레를 떨어봐도 미동도 안 한 체 가만히 눈을 들여다보는 무기질한 회색 눈이 불편해져서 좀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모금을 다시 시작했지만... 뒷통수에 매다 꼽히는 시선이 따갑다. 

 

 이놈아 눈으로 구멍 뚫을 일 있냐 그만 봐.

 

 곧게 찔러 올 눈빛을 마주 보지 않으려고 더 열심히 돌아다니며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날씨 좋은 봄 공원을 산책하거나  바자회의 이런저런 물건들을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 점점 더 빨간 모금함의 무게를 더 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은 즐겁다. 

 

 오늘 처음 보는 사람들도, 생선가게 청년 좋은 일 한다고 곱게 접은 지폐를 넣고 간 단골 할머니도, 저번 주 여친에게 어떤 꽃을 선물할지 상담해 준 숙맥 꼬마도, 엄마 아빠 손을 꼬옥 잡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동전 몇 개를 딸랑딸랑 집어넣은 소녀도, 요즘 매일 카페에 얼굴도장 찍으러 오는 아가씨들도, 모두 밝게 웃으며 가볍게 인사하고 모금함에 돈을 넣거나 바자회의 물건들을 사거나 구경하거나 하며 지나쳐간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한 명 한 명 웃으며 인사하고 평상시와 다르게 속으로 한 명 한 명 작별인사를 조용히 읊조렸다.

 

 아까 존재가 흐트러지며 느꼈지만 아마도 길어야 오늘 밤, 길고 가늘게 유지되고 있던 마력이 그 바닥을 드러내며 ‘나’는 이곳에서 흔적도 없이 소멸하고 좌로 돌아가겠지. 아니 애초에 돌아갈 수나 있으려나? 너무 이거저거 이상하고 전에 없던 일들이 많아서. 

 

 ...담배 고프네. 

 뭐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번 성배 전쟁은. 

 

 뭐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사력을 다한 전투를 바라고 발 디딘 이 땅은 소환된 서번트들을 탐욕스럽게 끌어안고 놔주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힘을 흡수하거나 간섭하는 것도 아니고, 욕망이나 소원을 위해 이 땅을 밟은 서번트들은 목적을 잃고 대신 평범한 삶에 평화로운 하루하루가 주어져 각자 다시없을 일상을 즐겼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랜서로 현계한 자신이 제일 적극적으로 일상을 즐겼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러니 더 이상 미련은 없다. 

 

 날씨도 좋고 바자회 핑계로 그동안 나름 신세 졌던 사람들과 인사도 나누고, 마지막 날에 봉사활동으로 사회공헌도 하고, 좋잖아? 

생각난 김에 그동안 아르바이트하며 벌었던 돈 중에 당장 오늘 쓸 돈을 제하고 모금함에 통째로 집어넣었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지폐 다발 부피가 꽤 두꺼운 거 보니 이번 바자회 성공에 꽤 기여하지 않을까. 궁병네 아가씨가 좋아하겠군, 그 수녀도. 

 

 남은 돈은 탈탈 털어서 돌아가는 길에 맥주랑 안줏거리 대충 사 들고 낚시터에서 한잔하면 딱이겠군. 가끔은 이렇게 평화로운 엔딩도 좋지 않을까. 

 

 한 가지 아쉬운 건 지금도 뒤통수가 따갑게 쳐다보고 있는 궁병 놈과 전력으로 한판 놀아보지 못하고 간다는 거 정도?

 

 아니 진짜 뚫어지겠네 그만 좀 봐라.

 

 속으로 중얼거리며 어쩌면 이거 평화로운 엔딩보단 귀찮은 엔딩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

 일부러 피하고 있다.

 

 랜서가 도망치듯 멀어져 간 후 계속 바라봤건만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늦은 오후가 되어 린을 도와 바자회의 뒷정리를 하며 잠깐 눈을 뗀 사이 그 남자는 신속의 영령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순간 무언가 철렁했지만 계속 관찰한 상태를 보아 마력 부족이긴 해도 그렇게 순식간에 소멸할 정도는 아닐 터였다.

 

 옆에서 린이 그가 남기고 간 모금함을 열어보더니 이번 바자회 대 성공이라며 희희낙락 돈을 세고 있는 걸 곁눈으로 보며 이제 거의 텅 빈 공원을 훑는다. 

 

 바자회가 끝나 사람들이 빠져나간 공원은 한산하고 어디에도 그 화려한 파란 머리는 보이지 않는다. 

 

 마력이 떨어진 서번트는 마스터에게 돌아가 마력 공급을 받는 게 정상적인 수순이겠지만 파란 창병이 그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왠지 가슴안에 묵직한 돌덩이같이 자리 잡았다.

 

 영령은 이미 죽은 자들 - 현계에 존재해서는 안 될 자들이지만 랜서는 마치 실제로 살아 숨 쉬는 인간처럼 웃고 떠들고 활동하며 지금의 휴우키에 남아 있는 그 어느 영령보다 더 삶을 만끽하며 선명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랜서가 그럴수록 그 생생한 파랑이 마치 사막에서 아른거리는 오아시스의 신기루처럼 덧없이 느껴져서 견딜 수 없었다.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렸을 심장이 무엇이 불안한지 고동을 반복한다. 

 

 빙글빙글 도는 사고 속에 아직 그 불안이 무엇인지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지만 바자회의 정리는 순조롭게 끝나 떠나는 린을 배웅한 후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주택가를 벗어나 빌딩 위를 달리며 랜서가 있을 만한 곳들을 샅샅이 뒤진다. 

 

 어디에도 없다. 

 

 평소에는 어딜 가나 있어서 싫어도 눈에 띄는 그 파랑이 보이지 않았다. 

 

 매의 눈이라도 건물 안까지 뚫어 볼 수는 없기에 결국 거리로 내려와 랜서가 알바하던 곳들 건물 안까지 뒤져 봤지만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랜서를 봤다는 사람을 만나도 마지막으로 봤던 곳은 공원의 바자회였다고 입을 모았다. 

 

 가슴의 고동이 점점 뜨겁게 빨라져 간다. 

 반대로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는 데 익숙한 머리가 차갑게 식어갔다. 

 

 고양이는 죽을 때가 오면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어 들어가 주인도 모르게 조용히 죽는다는 이야기가 머리를 스쳤다 흩어졌다.

랜서는 고양이가 아니라 개라고 마음속 어디선가 스스로 반박했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모든 곳을 다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그가 자주 보이던 낚시터로 발걸음을 옮긴다. 

 

 해가 지며 노을에 빨갛게 물든 부둣가에는 사람 하나 없었다. 

 그리고 이곳에 있을 거라는 확신 속에 머릿속 어른거리던 랜서의 모습도 없었다. 

 

 두근두근 싫은 맥동을 계속하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

 후- 하고 내쉬는 숨결 따라 하얀 연기가 하늘하늘 올라가 하얗게 떠 있는 보름달에 닿아 흩어졌다.

 

 낮에 바자회로 북적거리던 공원은 늦은 밤, 밝은 달빛 아래 하얗게 팔랑팔랑 떨어지는 벚꽃 외에는 아무도 없이 고요하고 아무 말 없이 한잔 하고 작별하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저 망할 궁병 놈만 아니면 말이지. 

 

 귀찮아질 거 같아서 자주 가던 곳 다 피하고 여기로 왔는데 역시 눈도 좋아. 

 

 보름달을 바라보던 시선을 내려 마치 유령같이 서 있는 궁병 놈을 쳐다보자 오후 내내 피하던 강철색 시선이 얽어 든다. 

또 뭐가 꼬였는지 전투 예장 상태로 부모의 원수를 보는 듯 날이 서 있는 눈빛 외에는 마치 석상같이 조용했다. 

 

 담배를 비벼 끄고 한참을 기다려줬지만, 눈빛만 시끄럽고 입을 열 생각이 없는 놈에게 싫증이나 편의점 봉투를 대충 더듬어 두 개 사 들고 온 맥주 캔을 꺼내 턱짓을 했다.

 

 “한잔할래?”

 

 또 말없이 망부석 짓이나 하려나 했더니 웬일로 성큼성큼 다가와 옆에 풀썩 주저앉길래 맥주캔 하나를 쥐여주고 나머지 하나를 따서 두어 모금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떻게 할 생각이지?”

 

 오, 다 생략하고 물어보는구나. 

 그런데 다 알면서 물어보네? 확인 사살이냐.

 

 “돌아가야지.”

 

 다 생략하고 물어본 질문처럼 다 생략하고 간결하게 대답해 줬다. 

 

 목적도 잃고 마력도 잃은 서번트가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하겠냐, 깔끔하게 좌로 돌아가야지.

 현계 하기 위한 마력도 이제 얼마 있으면 바닥인데 굳이 놈도 알고 나도 아는 걸 입 아프게 말해봐야 뭐해. 

 

 조금 아깝네, 아직 게이볼그 날릴 정도로 마력에 여유가 있을 때 이놈 잡고 마지막으로 한판 하고 싶단 생각을 하긴 했는데 아가씨에게도 미안하고, 내 욕심으로 평화로운 마을에 파문 일으키기도 좀 그렇더라.

 

 또 조개비처럼 입 꾹 다물고 손에 맥주캔만 내려다보며 인상 팍팍 쓰는 놈 어깨를 피식 웃으면서 가볍게 쳐 줬다.

 

 “맥주캔 성분 분석하냐? 마셔 마셔, 이게 마지막일 텐데 나 술친구 좀 해줘라”

 “너는... 누구보다 즐기면서 현계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꽤 깔끔하게 포기하는군”

 “글쎄? 이제 즐길 만큼 즐겼고, 어차피 언젠가는 돌아가야 하고, 엑스트라 스테이지를 이어갈 코인이 다 떨어진 지금이 적당히 떠날 때라고 생각하는데? 아까처럼 모금함 들고 마력 좀 적선해 줍소~ 하고 모금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하하 웃으며 다시 한 모금 쭉 들이켰다. 

 

 포기고 뭐고 지금 이 시간은 말하자면 게임에서 끝판 깨고 나오는 에필로그 엑스트라 스테이지 같은 거다, 그 왜 상점가에서 가끔 해 봤던 구닥다리 게임에서처럼 - 크레딧 뜨고 자막 나오고 엔딩 노래 흘러나오는. 

굳이 그걸 끝까지 보지 않고 떠나도 그걸 포기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하겠다.”

 

 뭐? 

 

 갑자기 뜬금없는 말에 다시 궁병을 쳐다봤다.

 

 “그 적선, 내가 해주지.”

 캔맥주가 땅에 떨어졌다, 아직 반 이상 남았는데.

 그리고 이번엔 항아리랑 다르게 그걸 캐치해 줄 궁병은 바빴다. 

 내 입안에 혀를 집어넣느라!

 

***  

 랜서를 찾아다니다 거의 마지막에 찾아간 부둣가에 그가 있으리라 막연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서늘한 바닷바람만 불고 텅 비어있는 그곳을 눈으로 확인했을 때 맥락 없이 배신당한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한 것도 아니다, 그저 이곳은 확실하게 랜서가 좋아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저 이곳에 있을 확률이 조금 높았을 뿐, 이곳에 그가 없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몇 번이나 되뇌어도 심장은 끊임없이 요동치며 어서 랜서를 찾아야 한다고 비명을 지르고 차게 식은 머리는 어쩌면 그 파랗고 시끄러운 남자는 여기서 조용히 혼자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닌가 고요히 절망하고 있었다.

 

 랜서의 이변을 눈치챘을 때 당장 그를 잡았어야 했나.

 

 하지만 잡아서, 그리고 그다음엔 무엇을...?

 

 지금 당장도 랜서를 찾아내면 자신이 무엇을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동요하고 절망하는 이 상태는 합리적이지 않다. 

 

 애써 흐트러진 감정의 고삐를 잡으려고 했지만 한번 무너진 평정은 돌아오지 않은 채, 도시를 가로질러 달음박질하며 목표를 찾아 정처 없이 두리번거리는 눈으로 드디어 랜서를 찾아낸 건 요행에 가까웠다. 

 

 밝은 달빛 아래 흐드러져 떨어지는 벚꽃을 배경으로 멍하니 앉아 있는 사내는 마치 떨어지는 벚꽃처럼 덧없고 다가가면 금방이라도 사라질 거 같이 현실감이 없었다.

 

 주박에 걸린 듯 굳어 있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와 마지막 한잔을 같이하자는 그 말이 너무나 현실감이 없어서,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낡은 시계의 기어가 움직이듯, 과정이 어찌 되었든 최선의 결과만을 추구하는 데 익숙한 사고가 삐걱거리며 드디어 답을 내놓았다. 

 

 랜서가 사라지는 것을 막으려면 마력이 필요하고 마력을 지금 당장 랜서에게 보충해 주면 된다.

 

 돈이든 마력이든 필요한 곳에 베푸는 것은 자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소용돌이치던 감정과 생각들이 마치 1+1의 답처럼 명료한 그 해결책에 만족하며 잠잠해졌고 손을 뻗어 파란 뒤통수를 잡아채 입술을 겹쳤다.

 

 서로 눈을 감지 않아 한가득 들어오는 붉은 눈동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깜빡거리는 것 외에 랜서에게서 저항은 없었다.

 

 키스가 깊어지자 움찔하며 머리가 뒤로 물러나는 게 느껴졌지만 한 손으로 단단히 뒷머리를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론 허리를 휘어잡아 도망치지 못하게 고정했다. 

 

 삐죽삐죽 서 있어 딱딱할 줄 알았던 머리카락은 놀랄 정도로 부드럽고 상기된 목덜미에서 희미하게 올라오는 체취는 방금까지 그가 피우던 메케한 담배 냄새와 깊은 숲을 연상시키는 향이 섞여 상반된 여운을 남겼다. 

 

 랜서의 마력은 마시던 맥주의 쌉쌀한 맛과 신성을 띈 깊은 샘물처럼 달고 청량함이 상반된 뒷맛을 남겼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는지 시간 감각이 모호해질 무렵, 랜서의 손이 느슨하게 주먹을 만들어 가슴을 노크하듯 통통 때렸다. 

 

 천천히 얼굴을 들어 입술을 떼자 하아... 하고 숨을 내쉬고 새빨간 혀를 내밀어 살짝 부어오른 입술에 묻은 타액을 핥는 모습은 끔찍하게 선정적이었다. 

 

 분홍색으로 상기된 피부와 촉촉이 젖은 입술과는 다르게 노려보는 붉은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아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이 남자의 눈동자를 들여다본 적이 있었던가. 

 

 서로의 호흡이 피부에 느껴질 만큼 가까운 곳에서 세로로 길게 갈라진 날카로운 동공에 응시되고 있는 지금이 방금까지 키스를... 아니, 마력 보충을 할 때보다 더 밀착해 있는 듯한 느낌과 동시에 발밑의 땅이 사라져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랜서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팔에 더 힘을 주어 그를 옭아맸다. 

 

 “...너”

 “마력 보충은 점막 접촉이 가장 효율이 좋다.”

 

 말없이 노려보던 그가 허리를 옥죄이는 팔의 힘을 느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낮게 부르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변명 같이 중얼거렸다. 

 

***

 일단 주는 건 받는 주의라 키스에 딸려오는 마력은 받아들였다. 받긴 했는데...

 

 거의 몇십 분이 지나도록 떨어질 줄 모르는 키스에 숨도 막혀서 궁병 놈의 가슴을 두드려 ‘이제 그만’ 신호를 보냈다.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는 놈의 입술에서 떨어진 마지막 마력 몇 방울을 핥아먹고 빠르게 마력을 순환시켜 현재 몸의 상태를 확인한다. 

 마력을 적선해준다던 말은 진심이었는지 타액으로 한 마력보충치고는 놀랄 정도로 많은 마력이 돌고 있었다.

 그래 봤자 패스가 이어지지 않는 한 하루 정도의 유예일 뿐이겠지만. 

 아무런 동의도 없이 입부터 들이대는 건 어느 나라 예법이냐며 한마디 해 주려고 깜빡임조차 없는 회색 눈을 노려봤다가 숨을 삼켰다.

 여자를 보는 남자의 눈이다.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눈이 마치 사냥감을 보는 눈 같아서 이놈이 대체 뭘 원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너무나 확실히 전해져왔다.

 살아있던 무렵이나 그 이후나 안아달라고 달라붙어 오는 여자들과 간혹 남자들도 있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눈에서 욕정을 줄기줄기 흘리며 자신을 안고 싶어 하는 눈빛은 그다지 받아본 적이 없기에, 그리고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던 놈의 눈빛이 이러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반했으면 안는 게 당연한거니까.  

 단지 이놈이 왜 뜬금없이 나에게 반해서 이러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주변에 이쁜 아가씨들 많은데 왜 하필?

 끈적한 호흡이 피부에 닿아 목 뒤에 솜털이 오소소 솟으면서 일단 이 밀착 상태를 어떻게든 하려는 찰나 허리에 느슨히 둘러져 있던 궁병의 팔이 놓치지 않겠다는 듯 힘이 들어갔다.  

 “...너”

 “마력보충은 점막 접촉이 가장 효율이 좋다.”

 눈은 입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지만, 망할 궁병의 눈은 키스보다 더한것을 원하고 있었다. 

 ...도망치자.

 나의 직감이 말하고 있다. 이건 도망가지 않으면 엄청나게 귀찮아지는 상황이야.

 “일단, 이거 놔.”

 “거절한다.”

 허리를 한 바퀴 돌아 꽉 잡고 있는 팔에서 벗어나려고 바르작거려 봤지만 꿈쩍하기는 커녕 더 강하게 얽매어 오면서 허리 근처를 쫙 펼친 놈의 손바닥이 지그시 눌러 오는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여기서 이걸 뿌리치고 도망칠 승산은?

 솔직히 아까 조금 보충된 마력만으론 이 녀석을 뿌리치고 무사히 도망칠 가능성은 없다. 

속도에서 이쪽이 유리하다 해도 도주는 쫓는 자가 끈질길수록 장기전이 될 텐데 처음에 어떻게 도망치더라도 속도를 유지할 수 없을 만큼 마력이 떨어지면 도로 붙잡히는 것은 안 봐도 뻔히 보이고 있으니까. 

 이놈이 날 끝까지 찾아낸 거랑 키스하는 꼴을 보니까 엄청나게 끈질길 거 같고. 

 “그엑!”

 이런저런 생각 하느라 눈알만 굴리고 있었더니 미친 궁병 놈이 허리를 감고 있던 팔에 힘을 주더니 한 팔만으로 그대로 날 들어 올려 어깨에 걸쳐매버렸다. 

 “쌀가마니 옮기냐?! 내려놔!”

 다리를 버둥거리자 다리까지 다른 한쪽 팔로 휘감아 고정시키더니 땅을 차고 하늘을 나는 중력에 눌려 다시 한번 그엑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야! 이거 완전 납치잖아!”

 “...구조활동이라고 해 두지”

 “내가 언제 구해달라고 했냐 마력 달라고 했냐 난 그냥 이대로...”

 “-닥쳐.”

 ...좌로 돌아간다고... 아니 근데 아까부터 말이 짧다? 낮게 이를 갈듯 나온 궁병의 목소리에 살기까지 느껴져서 게이볼그를 소환해 이 미친놈 등짝에 박아줄까 하다가 일단은 마력을 아끼고 상황을 보기로 했다. 그대로 팔꿈치를 놈의 등에 대고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주변 경치가 빠르게 휙휙 지나처가며 마을의 외각으로 향하고 있는 거 같았다. 

 아무래도 이동이 끝날 때까지는 선택지고 뭐고 없는 거 같은데...

한숨을 내 쉬며 한 손가락으로 궁병의 넓은 등짝에 새겨져 있는 검은 근육무늬 패턴을 덧그리자 손가락 밑의 근육이 움찔하고 경련한 후 속도가 더 높아졌다. 

 알기 쉬운 놈. 

 싸워서 이기는 것도 무리, 도망가는 것도 무리,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보쌈되어 가서 그대로 먹히는 건 나야말로 거절이다. 

 팽팽히 긴장한 등 근육을 손가락으로 주판 두드리듯 톡톡 튕기며 자신에게 욕정 한 게 뻔히 보이는데 자선이니 구조활동이니 핑계 대며 거저먹으려고 하는, 입만 발랑 까진 건방진 궁병 놈을 어떻게 벌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

 

 벚꽃이 내리던 공원에서 랜서를 들쳐메고 의외로 저항다운 저항을 하지 않는 그를 혼자 거주하는 아파트로 끌고 들어와 침대에 내던지고 그대로 그 위로 올라탔다.

 

 쌀가마니도 이렇게 거칠게 다루지는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입을 덮치고 반사적으로 밀어내려는 양 손목을 잡아 침대가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찍어내렸다.

 

 그의 말대로 납치나 마찬가지였다. 

 

 이곳으로 향하는 동안 랜서의 손길이 닿았던 등이 불을 붙인 듯 뜨겁고 신경이 곤두서 숨이 거칠었다.  

 

 “잠깐, 아ㅊ..읍...”

 

 양무릎 사이에 랜서의 몸을 깔고 앉아 움직임을 봉하고 양손목을 잡아 저항하지 못하게 누르고 머리를 돌려 피하려는 입술을 쫒아 키스를 하며 항의의 말을 막았다. 

 

 각도를 바꿀 때마다 입의 틈새로 흘러나오는 신음과 숨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 같았다. 

 

 잡아 누른 손목에서 저항이 사라지고 주먹을 꽉 쥐고 있던 하얀 손이 풀려 있는 것을 곁눈으로 확인한 후 양손을 그의 팔 위를 스치듯 움직여 그의 화려한 알로하 셔츠의 단추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너... 끝까지 할 생각이냐?”

 “물론.”

 

 마치 눈싸움하듯 서로 노려본 체 방안은 자신과 랜서의 숨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가 랜서가 고개를 팩 옆으로 돌려 눈을 감았다. 

 

 -드디어.

 

 그 옆얼굴은 거부이기도 했고 동시에 허가이기도 했다.   

 

 마침내 떨어진 허가에 아처는 자신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리는 걸 막지 못했다. 

 

 베개 위에 흐트러진 파란 머리카락, 뭔가를 견디듯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꼭 감은 두 눈, 손목을 잡혀 눌렸던 위치 그대로 시트를 움켜잡은 양손, 파해처진 알로하 셔츠 사이로 희미하게 땀이 떠올라 촉촉한 하얀 피부, 이것이 정말 그 랜서인가 싶을 정도로 처절한 색향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랜서...”

 

 그의 다리 위를 깔고 앉아 있던 하반신을 미끄러트려 랜서의 다리 사이에 앉아 그 매력적인 모습을 한 폭의 그림처럼 감상하며 랜서의 벨트에 손을 댄 순간.

 

 무언가 벼락에 맞은 듯한 충격과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세계가 반전되어 있었다.

 

***

 

 위험했다.

 

 방에 끌려들어 가면서 이런 상황이 될 것은 각오하고 있었고, 처음에 조금 저항하다가 포기한 척을 해서 궁병의 경계가 풀어졌을 때를 노려 게이볼그로 배때지에 바람구멍을 내주고 튈 생각이었는데...

 

 키스가 기분 좋았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처는 눈빛이 너무 필사적이어서 궁병의 배때지에 바람구멍을 내주는 대신 발차기를 넣어 날려버렸다. 

 

 몸을 굴려 일어나 거리를 벌리며 어깨 밑으로 흘러내려 걸쳐저있던 셔츠를 역소환하며 전투예장으로 몸을 덮고 게이볼그를 구현했다.

 

 ...자 그럼 어쩔까. 

 마력만 충분하면 한바탕 치고박고 싸우고 싶었지만 아까 끌려오며 계산한 대로 지금 남은 마력으로는 최선을 다한 사투 후 깔끔하게 사라지기는커녕 바둥거리다가 마력이 떨어지길 느긋하게 기다리는 궁병에게 약만 실컷 오르고 다시 침대로 질질 끌려들어가 키스보다 더한 것도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방금 방심한 틈을 타 치명타를 박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무력화시키지 못한 게 뼈아팠다. 

 

 날아가 벽에 금이 갈 정도로 부딪혀 바닥에 떨어진 아처는 멋들어지게 착지하더니 양손에 무한 생성되는 무기를 불러냈다. 

 

 그 눈은 완전히 동공이 열려 사냥감을 노리는 짐승같았다.

 

 이거 완전 망했네.

 

 이제 아처는 다시 방심하지 않을 터였다, 다음에 잡히면 아마 침대에 꽁꽁 묶이거나 팔다리 다 구속당한 체로 당하거나... 순간 금색 재수 없는 왕 놈의 얼굴이 스쳤다. 이것도 새로울 건 없지만 다시 겪고 싶은 종류의 체험은 아니다. 

 

 플랜 A는 궁병 놈 얼굴이 너무 필사적이어서 망설이다 망해버렸으니 이제 슬슬 플랜 B를 쓸 차례인데... 생각해 놓은 건 있지만 별로 쓰고 싶은 플랜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마지막 카드였으니까. 그대로 궁병이 하자는 대로 해도 되지 않나 싶은 마음 반, 귀찮다는 마음 반. 

 

 어차피 이제 곧 사라질 거, 여흥으로 살짝 여지를 주는 것도 괜찮을 거 같은데?

 

***

 

 너무나 급작스러운 상황에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지만, 배와 등을 찌르르 울리는 고통에 랜서가 어느새 그 다리로 자신을 차서 침실의 맞은편 벽까지 날려버렸다는 것을 이해했다.  

 

 더이상 저항하지 않을 거라 믿고 풀어준 순간 이 꼴이다.

 

 과연, 저항이 적어 이상하다 여겼는데 한순간의 방심을 노리고 있었던가. 

걷어차인 복부와 벽에 호되게 부딪힌 등이 지끈거렸지만 어느새 입은 웃고 있었다. 

 

 이미 계산은 끝났다, 지금 랜서의 잔류 마력으로는 자신을 이길 수 없다. 

아까 그 방심의 순간에 치명타라도 먹이지 않은 한 랜서가 도망갈 길은 없었지만 그는 자신을 걷어차서 날려버렸을 뿐 추가 공격조차 없었다. 

 

 양손에 간장 막야를 투영하며 랜서를 보자 그는 언제 침대에 널부러져 있었냐는 듯이 새침한 표정으로 파란 예장을 몸에 두르고 게이볼그를 소환해 이쪽을 겨누고 있었다. 

 

 간만에 보는 그의 예장 모습은 아처에게 그립기까지 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처음 봤을 때는 사냥당하는 입장에서, 지금은 사냥하는 입장에서. 

 

 입에 걸린 미소가 진해졌다.

 

 “아무리 내가 마력을 흘려 넣어 줬어도 그 정도 마력 가지고는 승부도 못된 다는 걸 알 텐데? 마력이 떨어져 머리까지 나빠진 건가 랜서.”

 “아아, 네놈이 ‘적선’해준 빈약한 마력 따위로는 마음 놓고 한탕 하지도 못하고 소멸하는 게 먼저겠지 아처.”

 “나는 너를 소멸하게 둘 생각이 없다.”

 “아 그래? 덮칠 생각은 있고?” 

 “필요하다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가 랜서와의 간격을 좁힌다. 

 

 랜서는 천천히 간격을 좁히는 저를 심드렁한 표정으로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긴 자창을 휘두를 공간이 충분하지 않은 좁은 방안, 마력량으로도, 공간적으로도, 그 어느 요소에서도 랜서에게 승산은 없었다.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면 짧은 간장 막야를 무기로 하는 아처의 영역이다. 그를 잡아 다시 침대에 눌러 이번엔 반항하지 못하게 팔과 다리를 철저하게 구속하면 된다. 

 

 “억지로라도.”

 

 이제 한 걸음만 더 접근하면 제압할 수 있는 영역에 들어서기 직전.

 

 “하... 전부터 생각했지만 너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사납게 웃은 랜서가 손을 가볍게 움직이고 붉은 창이 훙- 소리를 내며 한 바퀴 회전해 그 날카로운 창끝이 랜서의 심장을 향한 순간, 숨이 멎었다.

 

 “억지로 당하는 건 취향이 아니라 말이지... 너에게 질문을 하나 할 거야, 딱 세 번 만에 정답을 말하지 않으면 난 이대로 안녕이다.” 

 

 이쪽은 숨도 쉬어지지 않는데 빙긋 웃는 남자는 얄미울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침을 삼켜 바싹 마른 목을 축이고 입을 열었다. 뭐라도 말해야 했다.

 

 “...순결을 잃기보단 자결을 택하는 처녀 같군.”

 

 순식간에 랜서의 여유로운 표정이 일그러지며 질색하는 얼굴이 됐다. 

 

 “마력공급 한두 번 받아본 것도 아니고 돌았냐! 내가 마음에 안드는 건 필요 없다고 하는데도 날 덮쳐서까지 억지로 유지 시키려는 네놈이야! 내가 네놈에게 순순히 안겨줘야 할 이유가 내게 없어. 그렇다면 남은 건 네놈이 날 안으려는 이유를 대 봐.”

 “이게 처음이 아니었나...”

 “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빼액 소리지른 랜서가 씩씩 숨을 고르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날 안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이유를 대라. 납득되는 이유라면...못안겨줄것도 없지.”

 붉은 눈동자가 깊게 얽혀들며 대답을 요구했다. 

 이유... 랜서를 붙잡아 놓고 억지로라도 안아 마력보충을 하려던 이유, 분명 명백한 이유가 있었는데 저 뭐든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 아래에선 모든 게 다시 흐물흐물 불확실해져 갔다. 

 

 그래도 대답을 해야 하기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유를 대었다.

 

 “구조활동일 뿐이다. 네가 마력이 고갈돼서 소멸하기 전에 구하려면...”

 “고장난 레코더냐? 불합격.”

 

 -푸욱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창날이 예장을 베고 피가 터져 나왔다.

 

 “랜서!”

 “다가오지마! 이제 기회는 두 번이야.” 

 설마 진짜로 찌르다니...! 놀라서 한발 앞으로 움직였다가 그의 창처럼 날카로운 눈동자에 주박이라도 걸린 듯 멈춰 섰다. 

 심호흡을 하며 그의 가슴을 살피자 그저 예장을 찢고 살짝 창끝이 들어간 정도인지 피의 흐름은 느렸다. 하지만 피와 함께 흘러나오는 진한 마력...이미 마력량이 부족한 랜서는 이대로 가다간 영핵이 부서지지 않더라도 마력 고갈로 소멸하게 된다. 

 

 “두 번째, 대답해.”

 그 눈에 망설임은 없었다. 

 이 남자는 진심이다, 진심으로 자신의 현계에 관심이 없었다. 공원에서 벚꽃을 배경으로 덧없이 말했던 - 마치 게임의 엔딩 스테이지 정도로밖에 그에게 이곳은 의미가 없었던 걸까. 

 

 대답에 시간이 걸리자 서서히 힘을 주려는 그 창백한 손을 보며 다급히 말을... 무슨 말이든 그 손을 멈출 말을 해야 했다. 

 

 “네가... 네가 사라지면 곤란하다. 린도, 너와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도, 성당교회와 네 마스터도... 아직 성배가 어떤 상황을 일으킬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너 같은 전력을 잃으면...”

 “하—“

 랜서의 요란한 한숨에 더듬더듬 이어지던 말을 멈추자 랜서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또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엄청 바보구나? 불합격.”

 “잠깐!”

 -주룩...

 처음 마창이 심장부의 예장을 찢고 들어갈 때처럼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랜서의 팔에 힘이 들어갔고 흘러나오는 피의 양이 배가 되어 바닥으로 방울져 떨어졌다. 

 이대로라면 랜서가 사라진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근육의 융기를 따라 흘러내리는 붉은 핏방울을 눈으로 좇았다. 어떻게 하면 멈출 수 있지? 랜서가 원하는 답은 대체 뭐지? 빙빙 공회전하는 사고는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절박함만 더해 갔다. 

 “정말 이 정도로 돌대가리인 줄은 몰랐는데... 힌트를 주자면 남을 이유로 삼지 마, 온전히 너만의 이유여야 해.”

 마치 생선을 팔다가 남은 토막을 서비스로 넣어주겠단 말을 하듯 가볍게 랜서가 말했다. 다음은 없어. 라고도. 분명 느끼고 있을 고통의 파편도 보이지 않는 얼굴로 서늘하게.

 “마지막 기회다. 네 이유를 말해.”

 방안에 퍼지는 혈향.

 

 이제 시간이 없다.

 

 피를 통해 흘러내리는 마력은 이미 확실하게 랜서의 남은 목숨을 앗아가고 있었다. 

 

 랜서를 계속 현계시키고 싶은 이유에서 오답을 빼면 무엇이 남나. 그를 계속 보고 있고 싶다는 충동은? 곁에 있고 싶다는 망집은? ...그의 몸을 굴복시키고 모든 걸 가지고 싶다는 욕망은? 천천히 목구멍을 비집고 나온 자신의 목소리는 마치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을 속삭이는 것처럼 조용했지만 단말마처럼 처절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널 원해.”

 

 감히 욕심을 내면 안 될 것에 욕심낸 참회자같이 손에 든 간장 막야를 소멸시키며 고개를 숙였다.

 

***

 

 사랑한다느니 좋아한다느니 낯간지러운 답이 튀어나왔으면 그것만으로 오골거려서 승천할 뻔했는데 삐뚤어진 궁병치고는 제법 돌직구 승부 아닌가.

 

 뭐 그 정도면 합격점으로 쳐줄까.

 

 형세역전이다.

 

 잡아먹을 듯이 굴던 궁병이 모든 걸 포기하고 선처를 기다리는 죄인처럼 처연히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가슴을 찌르고 있던 마창을 역소환하고 하는김에 예장도... 실오라기 하나 입지 않은 맨살을 드러냈다.

 

 고백 아닌 고백을 뱉은 후 고장 난 듯 미동도 없는 궁병에게 다가가 몸을 숙여 그늘진 얼굴을 밑에서 들여다보며 샐쭉 웃어줬다.

 

 ”뭐 그 정도면 합격점으로 쳐 줄게. 나를 그렇게 원한다니... 나도 ‘적선’을 한번 해볼까.”

 

 설마 합격할지 몰랐다는 듯 입을 뻐끔거리며 크게 뜬 눈으로 훌렁 벗은 전신을 헤매는 시선이 어딘지 귀여워서 뻣뻣하게 굳은 목에 팔을 걸치고 접촉만 하는 베이비 키스를 했다.

 

 춉춉 소리를 내며 입술을 살짝살짝 누르고 쪼아먹듯 몇 번, 영혼이 나간 듯 가만히 있던 궁병이 갑자기 시동이 걸린 듯 거칠게 어깨를 잡는 걸 느끼고 쾌재를 부르는 순간.

 

 “지혈이 먼저다 랜서.”

 네??

 그대로 어깨를 눌려 침대에 눕혀졌다.

 “이 정도는 침 바르면 나아!”

 “그럴 리가 있나 이 멍청아! 자기 보구의 위력도 모르는 건가?! 게이볼그에 당한 상처는 완치가 어려운데 이렇게 스스로 상처를 내다니 미친 건가? 아니면 내게 마력보충 받는 게 그렇게 싫었나? 대영웅 쿠 훌린의 입맛에는 부족한 이름 없는 영령의 마력이라 송구하군그래! 하지만 네가...” 

 “하아?! 누가 멍청이야 이 멍청아!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은 마력 들이대면서 억지로 덮쳐지게 생겼는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면서 이게 다 널 위한 거라는 헛소리 들으면 누가 아 그러세요- 하고 안겨주냐 넌 양심도 없냐 이 새끼야!”

 “윽...!” 

 말싸움 중에도 아처는 이것저것 투영하더니 부지런히 손을 놀려 가슴의 피를 닦아내고 큼지막한 거즈를 상처 위에 고정시켰다.

아까 덮치던 기세가 거짓말같이 깔끔하게 의료적인 접촉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아처와 올려다보는 자신. 아까와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아까와는 전혀 달랐다. 

 지혈이 끝난 후 손을 뗀 아처가 조용하게 눈을 들여다봐왔다.

 “아까...합격점이라고 했었지.”

 “아아”

 “네가 마력보충이 필요한 것과 별개로 널 안고 싶다 랜서. 허락해 주겠나.”

 “너 정말... 분위기 다 깽판 쳐놓고 이러기냐.”

 그대로 누운 체 피식 웃으며 아처에게 양 팔을 벌려보였다. 

 “마지막으로 자선사업하고 떠나는 게 좋다고 생각하긴 했어도 나 자신을 적선하게 될지는 몰랐는데... 그래 와라 아처, 주기로 한 이상 확실하게 가져가.” 

 “랜서...!”

 

 아처의 예장이 공기에 녹듯 사라지고 그 전신이 드러났다. 

 

 입술을 덮쳐오는 아처에게 가려지기 직전에 본 그 넓은 가슴에는 마치 거울의 대칭처럼 지금 자신의 심장 위에 나있는 상처와 비슷한 흉터가 있었다.

 

 어쩌면, 이것도 운명일지 모른다고 입안을 정신없이 헤집는 뜨거운 혀를 느끼며 멍하니 생각했다.

 

 손을 들어 튼튼한 옆구리를 훑자 움찔하는 갈색 피부에 쿡쿡하고 목안으로 웃었다. 

 

 주겠다고 하긴 했어도 거저 주겠다고 하진 않았다. 아무리 뒤를 내주기로 했지만, 주도권까지 준다고 하진 않았거든?

 

 소리 없는 도전을 눈치챘는지 전의에 활활 불타오르는 회색 눈을 올려다보며 눈꼬리를 휘었다.

 

 긴 밤의 시작이었다.

 

 ***

 

 혹여 눈을 감으면 사라져 버릴 신기루 같아서 한숨도 자지 않았다. 

 

 그래도 실감이 나지 않아 잠이 들면 이 모든 게 꿈일 거 같아 자신과 랜서의 몸을 닦아 뒤처리를 하고 조금 열려있던 커튼 사이로 아침 해가 스며들 때까지, 엎드려 색색 숨을 쉬며 잠들어있는 랜서를 눈에 담고 간밤에 있었던 일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지금도 현실감이 없었다. 

 

 랜서의 삼문답의 마지막엔 머리가 새하얗게 돼서 널 원한다는 초라한 한마디를 내놓고 차마 랜서가 최후의 일격을 그 심장에 박아 넣는 걸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합격이라는 랜서의 말에 반응이 늦었다.

 

 겨우 그것으로?

 

 내가 널 원한다는, 억지로 쥐어 짜낸 보잘것없는 고백 하나에 그 몸을 내어준단 말인가.

 

 심장 위에 난 오래된 흉터를 쓰다듬는다.

 

 정말 우연에 우연을 거듭해 다시 만났고, 기적에 기적을 거듭해 그의 몸을 손에 넣었다.

 

 이불을 조심스레 걷어 그 아래 숨어 있던 매끄러운 나신을 바라본다.

 

 처음이 아니라고 했다, 마력 보충을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라고... 이 몸을 다른 누군가에게도 내어주고 그렇게 녹아내린 표정을 지었을까. 쉬어버린 목소리로 단어도 되지 못한 신음을 가쁘게 뱉었을까.

 

 스멀스멀 잉크처럼 퍼지는 질투와 상대에 대한 불합리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걸 눈치채고 헛웃음을 흘렸다. 자각해 보니 이미 중증이었다. 

 

 하얀 등에 흩어져있던 머리카락을 잡아 올려 그 파란 한 자락에 입맞추며 나직이 속삭였다. 

 

 “사랑한다 쿠 훌린. 이 현계에서만큼은... 나는 네 것이다.”

 

 그리고 너도 나만의 것이길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일까.

 

 몸은 손에 넣었다. 이제는 그 마음을 손에 넣을 차례였다.

 

 피곤에 절어 뻗어있는 몸 위로 다시 이불을 부드럽게 덮는다. 

 

 일어나면 분명 목이 마를 테니 바로 마실 수 있게 물을 가져다 사이드 테이블이 두고 허기를 채울 아침 식사를 준비하자. 

 

 남자의 마음을 공략하려면 그 위장부터 공략하라는 말도 있었지. 

 

 랜서가 깨어나면 배부르게 먹이고 무슨 말로 그를 이곳에서 같이 거주하게 설득할 것인가. 매끼 제공되는 식사와 수월한 마력공급과... 머릿속으로 그를 설득할 말들과 그가 솔깃해할 만한 조건들을 나열하다가 문득 멈추었다. 

 

 간밤에도 이런 식으로 계산하다가 랜서에게 거절당하지 않았던가. 

 

 나는 너의 곁에 있고 싶다. 

 

 쿠 훌린, 너는 단지 그것만으로 내 곁에 있어 줄까.

 

 ...자신이 없었다. 

 

 반대편 사이드 테이블에 있던 물병과 컵을 랜서 쪽 테이블로 옮기면서 아침 햇살에 은은하게 빛나며 조용히 잠들어 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예쁜 사람이다. 

 

 랜서가 들으면 화내겠지만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도자기같이 매끄럽고 하얀 피부, 뺨에 그늘을 만드는 긴 속눈썹, 한없이 남자다우면서도 동시에 중성적인 신성의 아름다움이 거기 있었다. 

 

 자신이 랜서에게 자선을 베푸는 줄 알았지만 결국 자선을 베푼 것은 랜서였다. 제 작은 그릇에 랜서를 담아 가둔 줄 알았지만 사실 처음부터 랜서의 큰 그릇에 기대 감히 그를 가지고 싶다고 억지를 부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달콤한 금단의 과실을 한 번 맛본 이상 이제 그만둘 수는 없다. 비대해진 욕심은 단지 그의 몸만 가지는 것으론 이제 만족할 수 없다. 과정이 어찌 되건 결과만 추구하는 방식으론 랜서를 온전히 가질 수 없다는 건 충분히 학습했다. 

 

 그렇다면 발톱을 숨기고 한없이 상냥한 덫을 놓자. 

 

 사람 좋은 그가 다 알면서도 눈감아 줄 만큼 편안하고 비겁한 올가미를.

 

 그가 자는 동안 눈이 부시지 않게 커튼의 틈새를 여미고 그가 좋아할 만한 아침 식사 메뉴를 머릿속으로 구상하며 방을 나와 덫의 입구를 막듯 조용히 문을 닫았다. 

 

***

 

 방문이 닫히는 순간 반짝하고 눈을 떴다.

 

 아처가 이불을 들추는 기척에 비몽사몽 했던 정신이 깔끔하게 깨어나 엎드려 눈을 뜰까 말까 하는 중 조용하게, 그리고 낮게 깔리는 사랑 고백에 놀라 순간 눈을 뜰 뻔했다.  

 

 어젯밤 그 긴 시간 동안 고장난 레코더처럼 랜서 랜서 애절하게 부를 뿐 한 번도 말하지 않은 걸 이제 와서.

 

 부스스 몸을 일으켜 아처가 가져다 놓은 물을 따라 시원하게 한잔 들이키자 새삼 간밤에 혹사한 목구멍이 따끔따끔 아팠다. 다른 곳들도. 

 

 인정한다. 아팠지만 확실히, 그보다 더 엄청나게 기분이 좋았다. 

 

 아무리 내 입으로 나를 준다고 했고, 확실하게 가져가라고 하긴 했지만 정말...철저하게 가져가는 군. 잠들기 전 마지막 기억엔 온몸이고 침대고 엉망이었는데, 막 세탁한 듯 깨끗한 이불과 상쾌할 정도로 깔끔한 몸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뭔가 억울했다.  

 

 가슴에 붙여둔 거즈는 처음엔 희미하게 피가 배어 나와 있었는데 그새 새로 갈은건지 지금 보니 깨끗하다. 내 몸에 마력을 그렇게 쏟아부었으니 이미 아물고도 남았을 텐데 굳이 다시 붙여두는 성실함에 쓴웃음을 흘리며 거즈를 고정한 테이프 째 찌익 잡아 뜯고 심장 위를 살피자 역시 창 끝이 들어간 모양대로 흉터가 희미하게 남았을 뿐 완전히 아물어 있었다. 영체화 한번 하면 이것 조차 사라질 테지.

 

 창을 제 스스로에게 겨누었을 때 당황하던 얼빠진 표정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직전까진 얄미운 비웃음을 흘리면서 다 잡은 사냥감을 어떻게 요리할까 하는 표정이었지. 

 

 방 밖에서 뭔가 요리를 하는지 통통통 도마 치는 소리와 버터의 고소한 냄새가 문틈으로 솔솔 들어왔다. 

 

 쾌감을 몇 번이고 공유한 덕에 희미하게 연결되어버린 패스를 통해서도 아처의 마력이 흘러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저놈도 마법사 적성이 있었군. 

 

 분위기가 뭔가... 원래 계획대로 하룻밤의 화끈한 성욕 해소를 마치고 너도 만족! 나도 만족! 그럼 이만! 하고 깔끔하게 보내줄 거 같지가 않은데...?

 

 아까의 사랑 고백도 그렇고 가늘고 길게 연결된 이 패스도 그렇고... 결국 처음 공원에서 아처의 끈질긴 눈빛을 보면서 예상한 귀찮은 엔딩이 되어버렸지만, 기분 좋았으니 상관없나.

 

 한판 하고 끝낼 게임이었는데 코인을 우수수 삽입된 꼴이다. 뭐라 그러지 이거, 강제 컨티뉴?

 

 실없는 생각에 피식 웃고는 여기저기 욱신거리는 몸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켜고 어슬렁어슬렁 침대를 빠져나갔다.   

  

 아직 사랑 타령에 어울려줄 만큼은 아니지만, 몸을 내어줄 만큼 호감은 있다. 

 

 어젯밤도 엄청 기분 좋았고... 조금쯤 더 게임을 즐기다 가볼까. 확실히 몸의 궁합은 끝내주게 잘 맞는 거 같으니까. 아처 녀석이 의외로 너무 절륜해서 문제지만 나도 어디 가서 절륜하면 절대 꿀리지 않는다. 어제는 그냥 좀... 여러 가지로 난생처음인 일이 많아서 주도권을 뺏겼을 뿐 얼마든지 리트라이 할 수 있다. 그럼, 내가 누군데. 절대 지고는 이대로 못 가지.

 

 문을 벌컥 열고 나가자 까만 앞치마를 몸에 두르고 한 손에 프라이팬을 든 아처가 뭔가 열심히 굽고 있었다. 혹시 햄이 들어간 프렌치토스트인가, 그거 좋아하는데.

 

 “여어 달링~ 아침 메뉴가 뭐야? 냄새 좋은데?”

 

 뻣뻣하게 긴장한 얼굴로 날 돌아본 아처에게 생글생글 웃으며 말해주자 입을 뻐끔거리며 얼간이 표정이 되었다. 하하하 이거 재미있네.

 

 “달...! 읏....!! 옷을 입어라 랜서!”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내 몸을 보더니 어두운 피부 위로도 확실히 알 수 있을 만큼 벌겋게 뺨을 물들이며 옷을 입으라고 난리 치는 낮은 목소리에 눈꼬리를 접으며 어제 누군가가 하도 마력을 처넣은 덕에 마력 운용이 불안정하다고 뻥을 치자 당황한 듯 달려와 제 검은 셔츠를 투영해 내 어깨에 걸치고 단추를 채워주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아침밥 뭔데?”

 “몬테크리스토 샌드위치다. 이제 곧 완성하니 얌전히 앉아서 기다려.”

 “녜이 녜이~”

 

 몬테크리스토? 처음 듣는데 엄청 거창한 이름이네. 그런데 바지는 안주나? 까만 셔츠가 조금 헐렁하고 기장이 길어서 아슬아슬하게 가려지긴 하는데... 이 사이즈 차이 살짝 열 받는다. 휑한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가 식탁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아처를 올려다보자 내려다보는 회색 눈동자가 간밤처럼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아- 너무 놀렸나...?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키며 이거 잘못하다간 진짜 잡아먹힐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에 진하게 미소 지었다. 

 

 원래 터무니없는 난제는 좋아하는 편이다.

 

 이대로 교활한 궁병의 덫에 걸려 기꺼이 사로잡혀 줄지, 무사히 쾌락만 즐기다 훌훌 털고 도망갈 수 있을지.

 

 어느 쪽이던 내가 지는 게임은 아니지만 어딘가 필사적인 아처의 표정을 보니 흥이 돋았다.

 

 라운드 투, 게임 스타트다. 

 Continue? Yes /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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