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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th

글 : 낰반 / 그림 : 핫            ​​           나태

 @Nakkban / None

 직무유기

 서번트는 전쟁을 위해 소환되었다.
 그렇다면 병기로써 소환된 영령들이 싸우지 않고 단지 현계하는 것은.. 존재하는 댓가를 치르지 않는 행위가 아닌가. 죽은 자들이 산 자들 사이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것은 분명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들렸나.”
 “뭐야, 나 들으라고 한 소리 아니었어?”
 "그럴 리가. 들으라고 한 말이라면 브레이크 타임에 맞춰 마감을 할 생각이 있기는 한 지 물었겠지."

 피식 웃으며 받아치는 아처의 말에 랜서는 쓸개 씹은 얼굴로 대걸레를 고쳐잡았다. 뭐라고 말을 한들 저 궁병의 말발에 휘말려야 본전도 못 뽑을 것이다.
 이 녀석은 카페 아르바이트를 해 본 적도 없다고 한 주제에 모든 일에 지나치게 능숙했다. 짧은 시간에 뚝딱 음식 만들어내는 솜씨나 요리하는 중간중간 설겆이를 해 두는 잔재주는 물론이고, 다른 주방 알바들은 랜서가 청소를 다 마칠 때까지도 저녁 타임에 쓸 재료들을 다듬어두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이 녀석은 벌써 일을 끝낸 뒤 멍때릴 여유까지 있는 모양이다. 

 ‘어울리지 않게 정신 팔고 있기는.’

 언젠가 랜서가 일하는 카페에 대타로 주방을 맡은 뒤로 아처는 종종 카페에 모습을 비췄다.

 처음엔 빈 시프트의 대타로 나오는 식이었지만 곧 주방알바 한 명이 일을 그만두면서 일주일에 두 번은 런치까지,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은 올타임으로 계약서를 썼다. 그 중 일주일에 두 번은 랜서와 시간이 겹쳤으니 어쩌면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랜서는 테이블과 의자 밑을 대걸레로 슬슬 밀며 주제를 바꿨다.

 "요즘 너네 아가씨가 걱정하던데,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냐?"
 "린이..?"
 "요즘 넋빠져서는 나사 한 두개 풀린 것처럼 다닌다며."
 "그녀가 그렇게 말했나?"

 뭐 그렇게까지 말 하진 않았지만 얼추 비슷한 느낌이었다. 랜서가 대답 대신 휘파람을 불며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자 아처는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앞치마의 뒷매듭을 풀었다. 오늘은 피차 종일 근무라 남은 브레이크 타임에 이야기를 할 시간도 충분하다. 아처는 바에 붙은 의자에 앉아 팔짱을 꼈다.

 "어째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군. 방금 그건 갑자기 든 생각이고, 평소엔 별다른 문제가 없을 텐데."

 그 말을 하는 얼굴은 태연한데다 옅은 의문까지 깔려 있었다. 정말로 자신의 마스터가 자신을 염려하고 있는 이유를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방금 전 지가 어리버리하게 굴던 꼴은 까맣게 잊은 모양이지? 랜서가 뭔가 짖궂게 말을 내뱉으려는 찰나 아처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리고 만약 나에게 문제가 생겼다 해도, 그 사실을 왜 굳이 랜서 너에게..”
 “와. 너무하네. 그야 요즘 내가 너랑 제일 많이 붙어다니니 그런 거 아냐!”

 랜서가 말했다시피 언젠가부터 이 두 서번트는 주구장창 붙어다니기 시작했다. 카페에서 근무할 때는 물론이고 휴일에 수영장을 가거나 쇼핑을 가거나 심지어 항구에서 낚시를 할 때조차.
 딱히 불편하진 않지만 깨닫고 보면 너무 오래 붙어있어서 서로 깜짝깜짝 놀랄 정도다.
 아처의 말문이 막힌 사이 바닥 청소를 완료한 랜서는 더러워진 대걸레를 화장실에 가서 깨끗하게 빨아왔다. 이브닝 타임이 끝난 뒤 다시 한번 활약할 때까지는 여기 매달려서 잘 마르는게 이 녀석의 일이다. 랜서는 턱을 괴고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는 아처의 옆자리에 털썩 앉으며 말을 이었다. 

 “뭐어, 네가 별 일 아니라면 아니겠지만. 혹시나 방금처럼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나 했지.”
 “쿠 훌린 네가 그렇게 말하다니 의외로군.”
 “뭐가?”

 자신에게 화살표가 날라올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아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분명 이 남자와는 서로 죽이기 위해 날붙이를 내민 적이 있다. 
 아니, 그것은 현재 후유키 시에 남은 모든 영령에게 해당되는 말이었다. 싸우기 위해 소환되었고 죽어 성배를 채우기 위해 소환되었다. 본래 이런 일상을 영위할 수 없는 것들이 사람 흉내를 내고 있으니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처는 자신의 마스터를 얕보고 있었다는 걸 인정했다. 이런 식으로 사소한 위화감에 매몰되고 있었다는걸 분명 알아차린 거겠지. 아처는 린이 종종 말했던 그 멍한 눈으로 랜서의 푸른 머리카락과 귀걸이 사이의 어느 공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는 분명 전투를 위해 성배와 계약했을 텐데, 지금이 답답하지 않은가?”

 

 본래 이 남자가 해야할 일은, 그리고 할 일은, 싸우는 것이다. 자신의 화살과 검을 튕겨내고 가슴에 창을 꽂아넣고 그 시체 위해 키스하거나.. 잠깐만. 왜 키스를?

 “읍!?”

 덥썩, 야만적으로 멱살을 틀어쥐고 입술을 부딪히는 감각에 아처의 정신은 빠르게 현실로 못박혔다. 입술 위를 짓누르는 말캉한 혀의 감촉과 자신의 혀를 통째로 깨물어 먹을 듯 선득한 송곳니.
 그리고 당황하며 벌어진 입에 혀를 집어넣고 볼 안을 쓸어올리며 자신을 꿰뚫는 붉은 시선에 아랫배가 지끈 울린다. 아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랜서의 뒷목을 쥐고 자신 쪽으로 바짝 끌어당겨 깊게 그를 빨아들였다.

 “으음..”

 랜서의 입술 사이에서 배부른 고양이처럼 만족스럽게 목을 울리는 신음이 새어나오자 천천히 입술이 떨어진다. 아처는 상기된 얼굴로 입술을 햩는 랜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조차 깜빡 잊은 얼굴이었다.

 “나는 좋아.”
 “무, 뭐..?”
 “너랑 피터지게 싸우는 것도 좋지만 이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아처는 랜서의 붉은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이 지나치게 빨갛지 않기를, 그저 그의 눈동자가 붉어 그렇게 보이는 것이길 진심으로 바랬다. 물론 택도 없는 소리였다.

 “나아 참. 소 잡는 칼로 닭 못 잡냐? 성배전쟁도 어영부영 끝났는데 좀 이것저것 즐기고 그러면 뭐 어때?”
 “난.. 아니, 랜서 너는.”
 “넌 재미 없냐?”

 랜서는 말을 멈추지 않고 아처의 무릎 위로 턱 올라타서는 코끝이 닿을 정도로 바짝 붙었다. 거기에 슬쩍 사타구니를 문질러 오니 아처는 양 손이 자유롭다면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려 항복을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양 손은 자석이라도 붙은 것처럼 랜서의 가슴 위로 착 달라붙어 셔츠 아래로 파고들었다. 룬 마술보다 더한 구속력이었다.

 랜서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낄낄 웃다가 점점 표정이 어색해졌다. 멍하니 넋빼고 있던 얼굴이 당황하는 꼴이나 보려고 했는데 어쩐지 점점 본격적으로 가슴이 애무당하고 있다.

 “어, 잠깐만, 어이, 여기 카페인데..?”
 “그래서 싫은가?”   

 물론 싫다는 건 아니었다. 방금 전의 나사 빠진 얼굴은 어디 가고 이런 얼굴인지 없던 마음도 생길 지경이다. 랜서는 뒷목이 오싹 달아오르는 느낌에 입맛을 다시며 아처의 눈꺼풀 위로 혀를 내밀어 햩았다. 
 불편한 듯 한쪽 눈을 찡그린 얼굴이 마음에 들어 입술 위로 낼름 혀를 옮기자 아처의 손가락이 유두를 문질러 비비며 기분 좋게 잡아당겼다.

 “읏..!”

 [띠디디디디-]

 막 분위기가 고조되는 찰나 단조롭게 올리는 알람음에 둘은 행동을 딱 멈췄다. 10분 뒤면 브레이크 타임이 끝난다는 알람이었다. 대낮에 그것도 가게에서 서로 이런 분위기가 된 것은 처음이라 그런지 저 재촉하는 듯한 소음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눈을 껌뻑이며 시계를 보던 랜서가 자리에서 스륵 일어서자 아처는 급히 그의 허리를 껴안고 자신의 무릎 위로 내려앉혔다. 

 “우왓, 너 무슨 짓이야!?”
 “랜서.”

 다리 사이에 와닿는 감촉은 이미 준비 만반이다. 물론 이런 걸 두고 가게 문을 열어야 하는 랜서로써도 아까워 죽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문은 열어야지, 어? 너 아까는 직무 유기가 어쩌고저쩌고..”
 “그래서..”

 평소의 이 녀석이라면 일하다 말고 키스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갑자기 무슨 대오각성을 했는지 성급하게 구는데 그 손길은 평소보다 더 뜨겁고 농밀했다. 
 스르륵, 하고 아처의 손이 랜서의 벗은 어깨를 스치며 셔츠를 벗겼다. 아니 단추는 언제 풀었어!? 팔에 어중간하게 걸린 셔츠를 무시하고 가슴에 입을 맞추며 그 손으로 이번에는 등줄기를 야릇하게 흩었다. 랜서의 얼굴이 점차 딱딱하게 굳자 아처는 한껏 감정을 담아 다시 물었다. 

 “싫은 건가..?”
 “......”

 결국 그 날 카페는 정시보다 한 시간 늦게 오픈했다. 재료를 준비하던 중 사고가 나서 급히 응급실을 갔다는 변명은 아주 잘 먹혔고, 아처는 오히려 카페 주인에게 쉬엄쉬엄하라는 염려까지 들었다.

 분위기에 휩쓸리는 바람에 벽에 기대 불편한 자세로 아처를 받아들여야 하는 데다가 뒷처리를 할 시간도 없어 뱃속이 불편했다. 랜서는 뻐근한 허리를 한 손으로 주무르며 캐비닛을 열었다.
 서번트의 원래 존재 이유고 나발이고, 일하라고 돈 주는 곳에서 이러는게 진짜 직무 유기가 아니면 뭐냐? 미야마 상점가의 충실한 일용직 노동자인 랜서는 아처의 고차원적인 고뇌를 거리낌없이 폄하했다. 

 “랜서, 크흠. 허리는 괜찮은가?”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웠는지 아처는 민망함이 가득 담긴 얼굴로 유니폼을 환복하는 랜서의 뒤로 다가와 부드럽게 허리를 감싸안았다. 아처가 자신의 뱃속에 질펀하게 싸지른 것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옷을 주워입고 카페를 오픈했을때부터 걱정스레 쳐다보더니 퍽 적극적이었다.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었던 아까와는 다른 것처럼 알량한 행동에 랜서는 코웃음을 쳤다. 하 참 누가 그렇게 말랑하게 나오면 순순히 괜찮다고 할 줄 아는가보지.

 “퇴근 후에 약속이 없다면 시간을 내 주지 않겠나.”
 “......”
 “욕조에 물을 받아둘테니..”

 랜서는 인상을 썼다. 목과 귀 사이의 예민한 곳에 아처가 입술을 문질러서가 아니라 뜨끈한 물이 가득 찬 욕조에서 몸을 씻는 것과 영체화 사이에서 어느 것을 골라야 하는지 격렬하게 고민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효율적이기로는 후자가 제일이지만 깨끗한 물에 몸을 담그는 것도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거기에 보통 이런 때면 아처는 자신의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게 하고서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알아서 손을 놀려서 사람을 아주 녹게 만들곤 했다..
그 손에 몸을 맡기면 사람 못 쓰게 되겠다 싶을 정도로 게을러지는건 한순간이었다. 

 “지금 바로 가는 거냐?”

 짧은 시간동안 치열하게 고민을 마친 랜서는 마침내 아처가 내민 미끼를 덥썩 물었다. 게으름이란 것은 단 맛이 나는지라 한 번 맛보면 도무지 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랜서의 목에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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