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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ience

글 : 호루                ​​                         인내

 성배 전쟁이 마무리된 이후의 아처는 지독하리만큼 담백했다. 전투를 할 때면 눈을 부릅뜨며 달려들고는 했던 녀석이 이제는 늘 찌푸리고 있던 미간조차 느슨하게 푼 채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꼴은, 괜스레 짜증이 나다 못해 종종 소름이 끼치기까지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랜서는 그런 아처의 눈빛이 저를 향할 때면 옅은 총기와 열기를 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으나, 그늘진 공원의 벤치에 늘어져 하늘을 보고 있다 앞을 지나가는 여성에게 말을 걸자 제 머리 위로 즉시 내리꽂히는 시선이 그랬다. 꽃집에서 자연스레 한 눈을 윙크하며 익숙한 교복의 소녀들에게 인사를 나눌 때나, 생선가게에서 스친 여성의 손을 가볍게 쥐며 붕붕 흔들 때도 그 시선은 늘 제게 꽂힌 채 사라질 줄을 몰랐다. 처음엔 감시라도 당하는 것인가 싶어 예민하게 굴었던 적도 있었지만 마스터의 식사 준비를 해야 한다며 굳이 저가 있는 생선가게로 찾아온 아처의 눈빛이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라, 랜서는 그 시선이 고작 감시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아챘다. 그가 주문한 고등어 두 토막을 손질하고 봉지에 담아 건네는 손끝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너무나도 깊었다.
 

 그 이후로 랜서는 저 시선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기다릴까, 혹은 부딪혀볼까.

 

 랜서는 골목에 쪼그리고 앉은 채로 입을 뻐끔뻐끔 벌리다 담배 연기를 후, 내뱉었다. 동그란 모양으로 내뱉어진 연기에 킬킬 웃어보이고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고 숨을 들이쉬자 폐 속으로 밀려드는 매캐한 연기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싸한 느낌은 그가 썩 좋아하는 감각이었다. 몇 번이고 그것을 반복하다 바닥에 떨어뜨린 담배를 신발 굽으로 지져 끈 랜서는 무릎을 짚으며 천천히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그는 언제나 앞뒤 재지 않고 돌격하는 타입이었으나, 종종 어디의 성격 나쁜 궁병처럼 인내를 가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한순간의 유흥일지도 몰랐으나 가끔은 얌전히 있어보는 것도 좋지 않은가. 골목 밖으로 빠져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에 피실피실 웃음이 나왔다.

***

 “…랜서. 요즘 어떻게 지내나?”

 이른 저녁시간의 상점가에 홀연히 나타나 연어 두 토막을 달라고 말한 아처가 비닐봉지를 가볍게 돌리는 저를 빤히 보더니 어색하게 말을 걸었다. 랜서는 대답 없이 봉지 끄트머리를 매듭지은 후 손을 내밀었다. 멍하니 제 앞으로 내밀어진 하얀 손을 보던 아처가 이내 동전지갑을 달칵 열고 뒤적이더니 짤랑거리는 동전을 몇 개 건넸다. 연어 두 토막의 가격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을 확인한 랜서는 귀찮게 거스름돈을 세어볼 필요가 없어져 씩 웃곤 앞치마의 주머니에 대충 돈을 쑤셔 넣었다. 힐끔힐끔 저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대답이 없으니 눈치를 보는 모양이었다. 거슬리긴 했으나 익숙한 시선이라, 별말은 하지 않았지만 저렇게 티를 낼 필요가 있나 싶었다.
 

 랜서는 이내 가만히 서있는 아처의 손에 단단히 묶인 비닐봉지를 쥐여 주었다. 이제 가라는 무언의 표시에도 아처는 미동조차 없이 한 손에는 묵직한 장바구니를, 다른 한 손에는 연어가 든 비닐봉지를 쥔 채로 서 있을 뿐이었다. 바지를 탁탁 털고 물기 묻은 앞치마를 손으로 정돈한 후 차라리 다른 손님을 맞으려 했는데 어중간한 시간대라 그런지 시끌벅적하던 거리가 유독 조용했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뱉자 아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눈치도 빠른 녀석이 이럴 때만 자기 좋을 대로 모르는 척을 해댄다. 랜서. 듣기 좋은 목소리가 얇은 입술에서 흘러나오자 랜서는 다시금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우리가 안부를 물을 사이는 아니지 않냐?”
 “남의 호의를 몰라보는 무례한 개군.”
 “개라고 하지 말라니까, 이 자식이.”

 

 괜히 또 시비다. 랜서는 미간에 주름이 잡힌 채로 아처를 노려보다가 퉁명스레 손을 휘저으며 당장 꺼지라 말했으나 아처는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평소에도 제 말이라면 개 짖는 소리로 치부하며 잘근잘근 씹어대는 그였으나 오늘따라 유독 정도가 심했다. 듣는 척이라도 할 것이지, 재수 없는 자식이. 눈으로는 올곧게 저만을 바라보는 주제에 청각은 저 멀리 날려 보내고 온 모양이었다. 다시 저를 부르는 소리에 신경질을 부리려 했으나 들려오는 진지한 목소리는 너무나도 의외였기에, 랜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처에게 시선을 돌려야 했다.

 

 "오늘, 저녁 식사를 함께 하지 않겠나."

 

***

 

 랜서는 낡은 빌라의 문 앞에 서서 한참동안 침음에 잠겼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초인종을 누르자 고장이라도 난 건지 아무런 소리도 나질 않아 문을 두어 번 두드리니 그제서야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문 틈새로 방문자를 확인한 남자는 금세 문을 활짝 열고 저에게 들어오라 말했다. 익숙한 검은 셔츠가 아닌 하얀 셔츠에 검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모습이 묘하게 어색하게 느껴져 헛기침을 한 랜서는 실례하겠다며 아처의 공간에 발을 들였다.
 

 뜬금없이 랜서를 저녁식사에 초대한 아처의 집에서는 고소하고 기름진 냄새가 나고 있었다. 서로 왁왁대며 싸워대는 주제에 이런 식으로 저를 초대해도 괜찮나 싶었으나 이내 넓은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음식의 향연을 보고 난 랜서는 그런 같잖은 생각은 집어치우기로 했다. 궁병의 요리가 그렇게 맛있다는 소문은 여기저기서 듣다못해 지겨울 지경이었으나 직접 보니 그런 단순한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을, 눈으로도 느껴지는 훌륭한 솜씨였다. 종종 먹게 되는 꼬마 녀석의 요리도 충분히 먹음직스럽고 맛있었으나 그보다 좀 더 화려하고 정갈한 아처의 요리는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돌 정도였다.

 "손부터 씻고 와라."
 "오우."

 겉옷을 벗은 채로 걸어둘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자 아처가 다가와 제 팔에 들려있던 겉옷을 가져갔다. 화장실은 저쪽이다. 고개를 끄덕인 랜서는 아처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 문을 열었다. 불쾌한 냄새라고는 조금도 나지 않는,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화장실은 손님이 온다는 이유로 부랴부랴 청소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정말 녀석다운 깔끔한 집이다. 세면대 바로 옆에 놓여있는 분홍색 곰돌이 모양 비누에 괜히 피실피실 웃음이 나왔다. 답지 않게 귀여운 취향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손을 씻고 물기가 젖은 채로 나오자 뒤도 돌아보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알았는지 손은 닦고 나오라며 호통을 친다. 혀를 내두른 랜서는 화장실로 상체를 들이밀고 벽에 걸린 수건에 손을 대충 닦은 후 슬쩍 눈치를 보며 부엌으로 걸어갔다. 그새 다 된 모양인지 분주하게 접시를 달그락거리며 음식을 담아내고 있는 아처의 뒷모습이 보였다.

 

 "도와줄까?"
 "손님은 앉아있기나 해라."

 

 단호한 한마디에 랜서는 굳이 돕겠다는 말을 더 이상 꺼내지 않으며 얌전히 제 옷이 걸려있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가만 앉아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고 있으니 아처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따끈하게 조리된 요리를 나르기 시작했다. 노릇하게 구워진 연어구이와 고소한 냄새가 나는 국 하나, 하얀 쌀밥에 여러 반찬들. 혼자 이렇게 열심히 먹고사는 건가, 이 녀석은. 정말 빠릿빠릿하고 귀찮게 사는 놈이었다.
 

 앞치마를 벗어 의자에 대충 걸어둔 아처가 랜서의 반대편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가지런히 마련되어 있는 식기를 손에 쥐며 아처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 아처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을 손에 쥐었다. 주인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더 이상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두고서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아처의 밥은 랜서의 예상보다 훨씬 맛이 좋았다. 훌륭하다 생각하고 있었던 꼬마 녀석의 요리가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는 순간이었다. 딱히 취향이 아닌 것 같은 음식들도 아처의 권유에 마지못해 입에 넣어보면 전부 맛있는 것들뿐이라, 이것저것 하나씩 집어먹어보던 랜서는 결국 밥을 세 그릇이나 먹었다. 아처는 작은 입을 오물거리다가도 랜서의 밥그릇이 비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밥그릇을 채워 랜서의 앞에 놓아주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기분이 좋아진 랜서는 아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며 웃어댔다. 생선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할머니 한 분이 오셔서 남편과 닮았다는 이야기를 했다던가, 카페에서 연인들이 싸우다 남자의 얼굴에 뜨거운 커피가 촥 부어지는 것을 보았다는 것 등등, 사소한 이야기들이었다.
 

 랜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며 아닌 척 아처를 관찰했다. 랜서의 웃음소리에 맞춰 입꼬리를 올리는 모습, 하얗고 정갈한 이가 보이며 음식을 씹어 삼키는 모습, 잿빛 눈동자에 저가 한가득 담기는 모습을 전부 볼 수 있었다. 식탁에 꽂혀있던 아처의 시선이 저를 향한 그 순간, 랜서는 꽃집에서 고백을 받았다는 말을 내뱉었다. 순간 열심히 움직이던 입이 한순간 굳었다 다시 움직였다. 음식을 씹어 꿀꺽 삼키는 속도가 지금까지의 속도보다 유독 빨랐다. 급해진 모양이지.

 

 "수락했나?"
 "꽤 귀여웠거든."

 

 아처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 표정을 보며 랜서는 속으로 몰래 웃었다.

 

 "너라는 녀석은…! 서번트인 주제에 일반인의 고백을 받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당연히 농담이지? 그걸 믿냐?"

 

 즐거워진 랜서는 자꾸만 지어지는 미소를 애써 진정시키며 남아있던 마지막 연어 한 점을 떼어 입에 쏙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어이없다는 듯 저를 멍하니 보고 있는 아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누구도 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저런 멍청한 표정이라니.

 

 "랜서, 너는…!"
 "잘 먹었습니다! 이야?, 맛있었다!"

 

 말하려던 잔소리의 흐름이 뚝 끊기자 불만스러운 듯 아처는 미간에 잔뜩 주름이 진 채였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웃고 있자 결국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쉰 아처가 그릇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살림을 몇 세기는 해본 것처럼 익숙하게 척척 정리해대는 모습에 이 녀석은 궁병이 아니라 집사로 소환되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아처를 보며 랜서는 턱을 괴고 아직까지 입에 남아있는 달짝지근하고 짭짤한 맛에 고여 있던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고 보니 꼬맹이네 집에서도 연어를 먹었는데. 그때 술을 한가득 사와 술판을 벌였던 것이 떠올랐다. 맛있는 음식과 맛있는 술, 얼마나 훌륭한 조합인가. 그러나 저 깔끔떠는 궁병은 저가 맥주캔을 잔뜩 들고 돌아다닐 때면 꼭 한소리를 해대고는 했다. 또 잔소리를 듣긴 싫은데. 하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였다.

 

 "좋은 식사 후에는 술이 최곤데 말이야."
 "그럴 줄 알고 준비해뒀으니 앉아있어라. 금방 가져다주지."
 "오? 네가 웬일이냐?"

 

 랜서는 당연히 알코올에 중독이라도 되었냐며 호통을 칠거라 예상하고 입맛을 다시며 슬쩍 꺼내본 말에 냉장고로 걸어가는 아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새하얀 냉장고 문을 연 아처는 허리를 숙이더니 이내 맥주캔 두 개를 들고 걸어왔다. 

 

 "두 개밖에 없어?"
 "더 있기는 하다만. 더 마실 건가?"
 "당연한 거 아니야?? 이걸론 간에 기별도 안 가."

 

 먼저 제 손에 쥐여진 차가운 맥주캔을 따 벌컥벌컥 들이마시자 불만스러운 듯 눈썹을 찡그리던 아처는 결국 하얀 봉지를 들고 와 식탁 위에 턱 내려두었다. 꽤나 묵직해 보이는 것이 답지 않게 많이 사둔 모양이었다. 다시 건너편의 의자에 풀썩 앉은 아처가 맥주캔을 하나 따며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예의 그 재수 없는 표정이었다.

 

 "…취하지나 말아라. 랜서."

***

 

 "으음…."
 "취했냐? 아처, 어이."

 

 취하지 말라고 하던 놈은 대체 어디의 잘난 궁병 놈이야.
 

 잔뜩 주름진 미간을 손가락 끝으로 꾹꾹 눌러보는데도 낮은 신음소리만 낼 뿐 별다른 반응이 없어 금세 흥이 식었다. 옆에서 조잘대는 목소리는 들리는 모양인지 이리저리 인상을 구겨대는데 입은 우물거리기만 할 뿐 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 금욕적인 녀석이 무슨 일이람. 술에 꼴아서 헤롱헤롱한 궁병이라니,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본다면 당장 저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겠다며 달려들지도 모를 한심한 모습이었다. 랜서는 턱을 괸 채로 캔에 남아있던 맥주를 한 모금 더 들이킨 후 아처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억센 손힘에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킨 아처가 잔뜩 풀린 눈으로 겨우 인상을 쓰며 저를 노려보았다. 저런 흐리멍텅한 눈으로 노려봐봤자 무섭기는커녕 웃기기나 할 뿐이다. 랜서는 쯧, 하고 가볍게 혀를 찼다.

 

 "취했냐? 침실로 데려다줄 테니 눕는 게 어때."
 "…랜서."

 

 아, 또 저 눈빛이다. 술기운을 빌려 저를 가만 응시하고 있는 아처의 진득한 시선은 이제는 익숙한 것이었다. 모르는 척 해줄까. 웃음이 비죽거리며 튀어나올 것 같았으나 참아낸 랜서는 아처를 일으켰다. 술에 절어있는 몸이 물을 가득 머금은 솜 마냥 무거웠으나 랜서에게 이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깨에 한 팔을 걸친 후 부축하자 술 냄새가 묻어나오는 호흡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랜서. 알고 있는 단어가 제 클래스명 뿐인 듯 자꾸 중얼거리는 녀석의 목소리는 평소의 무뚝뚝한 어조와는 달리 달짝지근한 기운을 담고 있어 괜히 가슴께가 간질간질했다. 몸을 가누질 못하고 비틀대는 몸의 허리를 꽉 붙잡은 후 성큼성큼 걸어 나가자 다리를 이리저리 휘적대면서도 용케 제 걸음에 맞춰 움직여 온다. 기특하다고 칭찬이라도 해줘야 하나 싶었다.
 

 꽉 닫혀있는 침실 문의 문고리를 돌린 후 발로 뻥 차서 열자 암흑이 저를 반기고 있었다. 몇 번 눈을 끔뻑이자 겨우 형태가 보이기 시작하는 침실의 가구 배치를 확인한 랜서는 벽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환하게 켜지는 전등에 제게 엉겨 붙어 있는 주정뱅이가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슬슬 귀찮아지니 이대로 눕혀두고 돌아가거나, 거실에 누워 자다 가야겠다 생각한 랜서는 다시 몇 걸음을 걸어 침대 위에 아처를 눕혔다. 제 어깨를 붙들고 있던 팔이 떨어지질 않아 정신을 팔고있는 새에 허리가 강제적으로 푹 숙여졌다. 고개가 함께 내려가는 바람에 코앞까지 다가온 아처가 제 목덜미에 팔을 걸친 채로 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저렇게 웃을 줄도 아는 녀석이었나. 술에 취해서? 아니면 눈앞에 있는 게 나라서? 어찌 되었든 당장 중요한 건 아니었다. 술에 취한 주제에 무슨 힘이 이렇게 강한지, 몸을 지탱하고 있는 팔이 후들거렸다.

 

 "랜서."
 "취했으면 곱게 자라, 응?"
 "랜서, 랜서. …쿠 훌린."

 

 푸핫. 평소의 조소가 아닌 기분 좋게 터지는 웃음소리는 랜서가 지금 눈앞에 있는 시커먼 남정네가 저가 평소에 알고 있던 그 재수 없는 궁병 놈이 맞는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투명한 빛을 내비치는 눈동자는 열기를 가득 담은 채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어 랜서는 결국 혀를 차며 이마를 맞댔다. 늘 단정하게 올리고 있던 하얀 머리카락 몇 올이 튀어나온 덕에 이마가 간질거렸으나, 크게 신경은 쓰이지 않았다. 그저 뜨끈한 숨결이 닿는 가까운 거리에서 저를 꿰뚫듯 바라보는 눈빛이 진득했다. 랜서. 또다시 들려오는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낮고 듣기 좋은 음색이다. 눈은 그렇게 흐릿한 주제에 목소리는 참 번듯하다.
 

 랜서는 아처가 무슨 말을 뱉을지 알고 있었다.

 

 "술 퍼마시고 잘하는 짓이다."
 "이 정도로 마신 건 오랜만이니 말이야."
 "그래 보이긴 하는데, 맨 정신으로 말하는 게 좋지 않겠냐?"
 "역시 다 알고 있었군…. 너라면 분명 알아챌 거라 생각했다."
 "아는 자식이 그렇게 보고만 있냐? 징그러워서 진짜."

 

 정말 정이라곤 가질 않는 남자다. 한숨을 내쉬고 팔에 힘을 풀자 그대로 저를 안아오는 몸에서는 술 냄새가 짙게 풍기고 있었다. 술이 깨고 나면 다 까먹었다면서 없던 일로 하자고 하는 거 아냐? 술에 꼴은 주제에 무슨 짓이냔 말이다. 자신이 할 말은 아니었으나 오늘의 궁병은 그 쿠 훌린에게 조차 어지간히 무드 없는 놈이었다. 랜서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인상을 찌푸렸다. 

 

 “빨리 말해. 오늘이면 들어줄 의향 있다.”
 “다신 없을 기회인가…. 영광이다.”
 “입만 살아가지고.”

 

 여전히 실실 웃고 있는 아처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절로 표정이 구겨졌지만, 목덜미에 닿아있는 손이 뜨거워 오늘만 참아주기로 했다. 지금껏 많이도 참았는데 이번 한 번 정도 더 참는다고 해가 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그 끝을 보는 날인 듯 했으니까. 아처의 시선이 유독 뜨거웠다. 제 등을 끌어안는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서로 시선만 마주하기를 몇 분, 아처의 입이 열렸다. 그 짧은 문장이 이어지는 동안 랜서는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좀 더 안달 나게 만들어 볼까. 지금이라도 모르는 척 몸을 빼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으나 랜서는 끝도 없이 기다리는 것은 취향이 아니었고, 저 답답한 녀석은 술기운을 빌리지 않는다면 이런 이야기를 할 일이 없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답지 않게 지금껏 참아온 탓에 자신도 인내할 여유가 더는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좋아한다, 쿠 훌린."

 

아처의 고백에, 술 냄새 풍기는 답변을 하는 대신 그대로 입을 맞추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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