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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erance

글 : 덕개 / 그림 : 새벽성​​                    절제

@deockGae / None 

 오랜 잠에서 깨어나듯 아처는 자신으로부터 떠올랐다. 고작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영체 상태에 익숙해진 몸은 형체가 아닌 비명을 구축한다. 당연하게 자신을 무시하고 아처는 현관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랜서가 노크를 하려는 건지 문을 때려 부수려는 건지 모를 자세로 주먹을 든 채 서 있다가, 아처와 눈이 마주치곤 가볍게 웃었다.

 "땡큐~"

 

 아처가 그랬듯, 랜서 또한 용건이 뭐냔 소릴 듣기 전에 토오사카 저택에 발을 딛는다. 제집인 양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향하는 랜서는 햇볕이 따라 들어온 것처럼 모든 불을 끈 저택 안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아처는 자연스럽게 그를 쫓는 모양새가 된다. 랜서가 식탁 위에 양손 가득 가져온 식재료들을 내려놓기 시작하는 걸 보며 아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식당을 개업한 기억은 없는데. 주소를 착각한 게 아닌가?"

 "잠꼬대하는 꼴을 보니 제대로 찾아왔네. 잠깐 부엌 좀 빌릴 테니까, 거기 앉아있어."

 랜서가 아까까지 아처가 고여 있었던 소파를 가리킨다. 아처는 일부러 풀썩 소리가 나도록 앉아 다리를 꼬고 거만히 랜서를 내려다봤지만, 쥐뿔도 시선을 주질 않으니 편히 몸을 기댔다.

 

 마술사는 가문과 계승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떠돌이 마술사는 그렇게 흔하지 않다. 마술계의 변두리에 속하는 이곳에 공방을 지으려는 이는 더더욱. 하지만 확률이 0이 아닌 모든 사건은 결국 일어나기에, 세컨드 오너로서 무허가 공방의 퇴거를 요청한 린은 그 희박한 마술사에게 공격받았다. 린이 바로 응전했고 동행한 아처가 화력을 더해 간밤은 한여름 축제만큼이나 요란했었다.

 

 떠돌 만한 마술사였다. 아처는 그렇게 판단했다. 공동체를 무시하고 폭력을 가장 먼저 선택한다. 후유키 시도 여기저기서 쫓겨난 끝에 도달한 곳이리라. 어쩐지 침을 뱉어도 늘상 입안을 맴돌던 모래가 씹히는 듯해 입맛이 썼다. 아처는 시선을 다시 현실로 돌렸다.

 

 랜서는 앞치마까지 꺼내 입고 재료를 손질하고 있었다. 스프인지 육수인지도 분간이 안 갈 만큼 진한 향을 풍기는 액체가 슬슬 끓어오르는 소릴 낸다. 랜서는 종종 잡은 물고기나 일터에서 팔고 남은 음식을 술과 함께 가져오곤 했지만, 오늘은 유난히 양이 많아 성인 5명은 거뜬히 먹일 수 있을 정도다. 거대한 톱니바퀴가 둔중한 소리를 내며 계산을 시작한다.

 랜서의 주특기는 대량의 재료를 한 번에 몰아넣는 야외요리다. 여러 재료로 다양한 요리를 동시에 조리하는 건, 아무리 기본적인 솜씨가 좋다 해도 익숙하지 않은 이상 재료를 버리기 쉽다. 그럴 수는 없지. 아처는 소매를 걷고 부엌에 다가가, 랜서가 매고 있는 자신의 앞치마 대신 린의 것을 허리춤에 묶었다. 랜서가 자연스럽게 곁을 내준다.

 

 "보기보다 고전하고 있던 모양이군."

 "넌 몸은 고사하고 입도 가만히 못 있냐?"

 "누구와는 다르게, 말 잘 듣는 개가 아니라서."

 "하, 차라리 개가 낫지."

 

 오늘따라 랜서의 도량이 넓어 어지간한 돌로는 파문도 일지 않는다. 아처는 랜서의 입을 여는 걸 포기하고 요리에 집중했다. 둘 다 손이 작은 편이 아니었기에 토오사카 저택에서 가장 큰 접시들이 오랜만에 빛을 보게 되었고, 식탁 위에 가득 차 있는 음식들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지경이다. 랜서가 의자에 털썩 앉아 양쪽에 수저를 놓았다. 자신의 것과 아처의 것. 손에 남은 물기를 닦던 아처는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의아함을 표시했다.

 

 "너 혼자 먹을 계획 아니었나?"

 "아닌데."

 

 시원스레 답하는 랜서가 아처에게는 마치 양손바닥을 일부러 보여주고 있는 마술사처럼 느껴졌다. 와서 앉으라고 발로 밀어준 의자에 순순히 자리 잡긴 했어도 아처는 거슬릴 정도로 미심쩍었다. 랜서는 호의를 베푸는데 인색하지 않다. 하지만 상대가 자신이라면 그건 합당한 의심이 된다.

 

 "무슨 속셈이지."

 

 일부러 더 날을 세워 묻자, 랜서는 단박에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너냐?"

 "나도 아닌데, 무엇하러 목적을 숨기고 있는지 모르겠군."

 

 랜서가 질렸다는 얼굴을 한다. 이 상황, 혹은 다른 무언가와 함께 음식을 씹어 삼킨다. 와중에 대답은 성실히 해준다.

 

 "마력 부족하잖냐, 너."

 "...어떻게, 아니, 이 얘기는 그만하지."

 "잘 먹고 잘 자면 그럭저럭 버틸 만해."

 

 선배의 조언이라며 씨익 이를 드러내는 랜서에게 아처는 뭐라 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단출한 뱃속만큼이나 머릿속도 곤궁했다.

서번트의 마력 고갈은 허기와 갈증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추위와 같이, 그것이 느껴진다고 해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아처에게 없었다. 그건 생명유지활동이고 아처는 이미 죽었다. 아주 오래 전, 남에게 빌린 이상을 검처럼 휘두르기 전부터.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다."

 "엄청 시끄럽던데."

 "늦은 밤에 실례했군. 하지만 또 전투에 투입되지 않는 이상, 존재하는 데엔 지장 없다."

 

 지금 상태로도 시체처럼 지낸다면 아처는 3일은 더 버틸 것이고, 아예 영체 상태로 지낸다면 훨씬 오래 현계할 수 있다. 의문은 여기서 생겨났다. 기능할 수 없는 자신이 왜 존재해야 하는가? '왜'라는 질문은 세계 속의 수호자처럼 문장 가운데 이질적으로 서 있다. 아처는 언제나 '어떻게'를 고민해왔다. 타인을 위해 존재했기 때문에 타인이 존재하는 이상 아처가 존재하는 것 또한 당연했다. 당연한 일이었는데. 딛고 서 있는 땅이 흐느끼는 등처럼 무너져 간다.

 

 "흐음."

 

 랜서는 음식에 대한 감탄인지, 아니면 아처의 초조함에 하등 관심 없단 표현인지 짧게 소리를 내고 입안을 가득 채운 채 우물댔다. 푸짐하게 차려진 상보다 오히려 그쪽이 더 아처의 식욕을 돋웠다. 서번트는 손질한 채소와 고기보다 더 많은 마력을 갖고 있으니까. 모든 치아가 동시에 새로 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손으로 감싸 누르고 있자, 자신의 몫을 전부 먹어 치운 랜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묻는다.

 

 "진짜 안 먹을 거냐?"

 

 랜서는 두 번 묻지 않는다.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아처가 원하는 걸 권유하는 게 아니다. 그걸 잘 알고 있기에 혈관 속 피가 모조리 검으로 바뀐 것처럼 들끓음에도 불구하고, 아처는 가까스로 자신을 붙잡을 수 있었다.

 

 "거절하지."

 "왜?"

 

 아처는 잔뜩 구기고 있던 눈을 둥글게 떴다. 랜서가 묻는다면 사람을 묻지, 이유를 묻는 일은 드물었다. 토오사카 저택에서 아처를 위해 자기 식사까지 준비한 것보다 한 단어로 된 질문을 아처에게 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그래서 성심성의껏 놀라움을 숨기기 위한 답변을 준비하던 아처는, 그만 수많은 대답 중 가장 먼저 배제했던 최악의 대답을 내뱉어버리고 말았다.

 

 "참지 못하게 될 것 같으니."

 

 무엇을, 이라고 물을 만큼 랜서는 눈치 없지 않다. 아처의 시선은 뱀이 되어 반쯤 빈 식탁 위를 맴돌다 랜서를 타고 올라 그를 휘감았다. 생전 수많은 이가 갈망한 영웅이 그 뜻을 모를 리 없었다.

 

 "아-하."

 

 음식 취급을 받은 랜서는 되레 재밌다는 듯 창끝처럼 웃는다. 랜서의 시선은 그의 말과 빛과 같이 곧아, 종종 마주하기 힘들었고 지금도 그러했다. 그리고 아처는 그런 상황에서 도망칠 줄 몰랐다. 판결처럼 랜서의 말이 내려진다.

 

 "못 참고 나한테까지 손을 댈 것 같다, 이 말이지."

 "얘기가 빠르니 좋군. 그러니-"

 "댈 수 있기나 하냐?"

 

 네가? 나한테? 랜서는 명백하게 비웃고 있었다. 일차원적인 도발이다. 평소 상태의 아처라면 몇 배는 더 복잡한 말로 랜서의 뇌에 있는 주름까지도 찌푸리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이 자각하고 있는 대로, 현재 아처는 마력을 보충하기 위해 자신의 뇌를 흡수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러니 멍청한 짓임을 알면서도 굽은 바늘에 꿰인 미끼를 덥석 물 수 밖에 없었다. 말만큼은 멀쩡히 지껄였다.

 

 "과한 자신감은 독이라는 말도 모르는 것 같군."

 "아예 없는 것보단 훨씬 낫지 않냐? 아, 먼저 밥부터 마저 먹고."

 

 강자의 여유를 가감 없이 뿜어대며 도전을 수락한 랜서는 순식간에 음식을 모두 뱃속에 우겨넣었다. 아처는 현란한 한 겹 천 위에 손을 얹으면 들어간 것들이 만져질지도 모른다는 충동이 들었지만, 다행히도 양손을 붙잡고 있던 덕에 화를 면했다. 그걸 보고 있던 랜서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비슷한 자세를 취한다.

 

 "너랑 나랑 차이가 있는데, 이 정도는 봐줘야 좀 해볼 만하지."

 

 둘의 속도를 고려하면 토오사카 저택 전체도 술래잡기의 무대로는 협소하다. 승부를 가르는 건 얼마나 방향전환을 빨리 하는가가 될 터이므로, 팔을 쓰지 않는 건 굉장한 단점이 된다. 얕보고 있다 못해 무시하는 수준이지 않은가. 아처는 대꾸할 힘도 아껴, 어디로 랜서를 몰아 하늘 높이 치솟은 그의 자만을 바닥에 쳐박아 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럼, 잡아보라고."

 

 푸른 궤적이 보인다 싶더니 곧이어 볼에 촉촉한 것이 스쳤다. 이미 모든 사건은 과거가 되어 잔상조차 남지 않았고, 랜서만이 자리를 옮겨 무언가가 일어났다는 증거가 되었다. 여전히 두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랜서가 가볍게 몸을 푼다.

 

 "그럼 뭐든 하나 들어줄 테니까."

 

 미끼가 아니라 상어를 물었다며 전율이 소리친다. 진저리 날 만큼 익숙한 감각에 아처는 화살이 되어 랜서에게 쏘아졌다. 속도로는 절대 그를 이길 수 없다. 잘 알고 있는데도, 긴 머리칼이 팔 뻗으면 닿을 곳에서 흔들리면 어디선가 고양이가 달려와 사고하려 애쓰는 뇌를 후려갈기는 기분이었다. 얻어맞은 아처의 뇌는 조건반사처럼 랜서 쪽을 향해 팔을 휘둘렀고 당연히 랜서는 잡히지 않는다. 오히려 랜서의 맨발이 아처에게 닿았다. 올라선 이의 무게가 느껴지기도 전에 도약의 반동으로 아처는 꼴사납게 카펫과 함께 밀려난다. 승부욕이 귀가 먹먹해질 만큼 당장 멈춰서 이길 방법을 궁리하라고 소리쳤지만, 정말로 귀가 먹었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랜서가 가끔씩 뱉는 호흡만이 귓가를 간질인다. 몇 번을 더 구른 아처는 정말 간절하게 그 숨소리를 먹어 치우고 싶어졌다.

 

 쫓지 않으면 랜서는 멈췄고, 쫓으면 달렸다. 매번 그의 머리카락이나 맨살이 손가락 한 마디 차이로 잡히질 않는다. 랜서는 종종 아처를 징검다리 삼아 그를 힘주어 밟으면서 좁은 방을 활보했다. 스스로 묶은 손 대신 어깨로 곁을 노리는 아처의 팔 안쪽을 치기도 했다. 속도가 느려졌다 싶으면 호되게 다리를 걷어찼다. 거짓말 같지만, 아처는 랜서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맞은 뒤 그걸 잡으려 자기 눈을 전력으로 치기도 했다. 시야를 뒤흔드는 모든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아처의 눈은 달의 밝은 면이 언제나 지구를 향하는 것처럼 랜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걸로는 한참 부족했다. 아처가 생각하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그렇듯이.

 

 눈앞의 랜서가 하늘의 별처럼 멀게 느껴졌다. 온몸이 헐떡이며 살아있다고 절규하는 것 같았다. 몸은 중력에 허우적대고 있었는데도, 부질없이 정신만은 또렷했다. 아처는 포기하는 방법조차 모자라 불가능하게 밖에 보이지 않는 술래잡기를 이어갔다. 후회가 과거를 쫓듯이 숨 가쁘게 달리는 아처는 무의미 그 자체가 된다. 질서정연하게 아처를 이루는 모든 게 엉망이 되어간다. 아처는 랜서를 쫓는 것 이외에 다른 건 어찌 되어도 좋을 정도로 집중했다.

 

 "아처?!"

 

 아처가 자각할 수 있는 세계의 반을 이루던 하얗고 푸른 등이 갑작스레 커졌다. 아직도 피로감에 반쯤 잠긴 린의 목소리가 아수라장이 된 저택에 울렸다. 구석구석을 뒤집은 것처럼 자욱한 먼지에 기침을 시작하기에 거의 네 발로 뛰고 있던 아처는 급히 앞발을 들어올려 창문을 열었다. 붉은 하늘이 냉기를 아처에게 흠뻑 끼얹자, 빈약한 토대 위로 다시 정신이 중심을 잡으려 휘청였다.

 

 "이런. 꼴이 말이 아니네, 아가씨."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둘 다... 아아, 집도 엉망이 되어선."

 

 지친 사람은 쉽게 가라앉는다. 린은 긴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다시 치켜뜬 파란 눈은 어젯밤 치러진 전투의 후유증으로 어두운 얼굴 가운데서도 빛난다.

 

 "2층은 멀쩡하지?"

 "오우. 여기서만 놀았으니 걱정 말라고."

 

 더이상 말할 기력도 없는 린은 문을 닫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눈과 아처를 향해 두 손가락으로 가리킨 뒤, 무거운 몸을 이끌고 계단을 올랐다. 멍하니 소리를 올려다보는 랜서의 팔뚝을 아처가 움켜쥔다.

 

 "잡았군."

 "잡혀준 거야. 그보다 아가씨 온 시점에서 끝난 거 아녔냐?"

 "언제가 끝이라곤 말하지 않았으니, 아니다."

 "떼쓰긴. 좋아, 왈가왈부하기 싫고 한 말도 한 말이니까. 뭘 원해?"

 

 아처는 바닥까지 바짝 마르고 나서야 드러나는 마음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적조차 사랑하게 되는 영웅은 사랑 받을 줄 알았다. 그러니, 답은 간단했다. 지나치게 간단했다. 한 마디, 혹은 누군가를 가리키는 한 단어. 아처는 아직도 그것이 어디 있는지 알았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꺼내든 열쇠는, 녹이 슬어 쓸 수 없었다. 실행 불가능하기에 간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처는 삭막한 고유결계의 풍경을 떠올리며 자조했다. 영원히 묻힐 수 없는 자신의 무덤을.

 

 "연대 책임이다. 청소를 도와라."

 

 전진하나 싶더니 아예 원점으로 돌아가 버리는 아처에게 랜서는 맥이 빠진단 표정을 지었지만, 열심히 투덜거리면서도 자신의 만행을 지워나갔다. 가장 저기압일 때의 린조차 만족할 수 있을 만큼 정돈이 되자 랜서에게 쥐어줬던 걸레가 아처의 뒤통수를 향해 던져진다. 아처는 한 걸음 비껴나 까매진 물을 담아둔 양동이로 걸레를 깔끔하게 받았다.

 

 "불만이 많은가 보군. 술래잡기에서 진 게 그렇게 분한가?"

 "마력 좀 도니 입도 사네. 그런 거 아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올리며 랜서는 뾰로통하게 대꾸했다. 린과의 마력회로도 다시 이어지고 있었고, 한껏 뛰고 나니 개운했다. 아처의 얼굴이 말갛게 핀다. 그러니 기분 좋은 김에 엉뚱한 소리 좀 해도 됐을 텐데. 반밖에 안 먹은 밥상을 치운 것 같아 랜서는 여간 찝찝한 게 아녔다.

 

 "그럼 뭐길래 그렇게 뭐 마려운 개처럼 거기 서 있는 거지? 볼일은 모두 끝났을 텐데."

 "개라고 했겠다...!"

 

 자연스럽게 둘의 몸이 서로의 호흡을 마실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진다. 아처가 신경을 긁으면 랜서가 잘 긁었다고 으르렁댄다. 미리 약속한 것처럼 익숙한 리듬이다. 랜서는 굳이 이 장단에 어울릴 필요가 없단 걸 갑자기 깨닫고, 그저 한 뼘 더 다가갔을 뿐이었다. 입이 닿고 혀가 섞인 건 부차적인 문제다. 당황해서 자신의 전투예장보다 더 빨개진 아처는 대가일까, 덤일까. 랜서에게는 어느 쪽이든 좋았으니 상관없었다. 벙찐 아처의 뺨을 툭툭 털며 한결 시원해진 랜서가 말한다.

 

 "이게 진짜 참아주고 있는 거지. 팔팔해져서 오라고~"

 

 랜서의 절제는 오롯이 주인에게만 향했다. 그러니 기꺼이 주어진 이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일까. 아처가 질 수 없다는 듯 마주 웃어주며 선언한다.

 

 "그때가 된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랜서는 가던 길을 멈추고, 고개만 돌려 만족스럽게 답한다.

 

 "그거 기대되는데."

 

 달칵, 마지막 퍼즐 조각이 제자리에 들어가는 소리가 나며 문이 닫혔다. 둘이 청소한 응접실에서 아처는 다시 소파에 몸을 맡겼다. 영체 아닌데도 떠오르고 있는 기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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