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Chastity

글 : 낰반 / 그림 : 시랴          ​​            순결

 “지금 오냐.”
 “원래 비번이었다고. 갑자기 왠 소환이야?”

 

 타박하는 듯한 말투에 랜서는 눈썹을 찡그리며 잔뜩 툴툴거렸다. 
 방 안에서 모처럼 아처 녀석과 느긋하게 노닥거리는 중이었다. 하루 종일 침대 밖에서 나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모든 서번트를 긴급하게 식당으로 소환하는 메세지에 서둘러 걸음을 옮긴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기긴 했는지 룬으로 메세지를 보낸 캐스터 쪽의 나는 물론이고 평소 잘 보이지 않던 서번트들까지 아주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랜서는 식당 문 앞에 모인 면면을 쭈욱 흩어보며 입을 열었다.

 

 “식당에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거냐?”

 

 그렇다면 아처를 부른 이유도 납득이 간다. 그러나 캐스터와 아처는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것 같지는 않군. 그렇다면 다들 식당 안에 들어가 있었을 테니.”
 “백 마디 말보다 저걸 보는게 낫겠지.”

 

 캐스터는 턱짓으로 소란의 중심인 식당 문을 가르켰다. 
별다를 것 없는 그냥 문이었다. 그 위에 종이 한 장이 붙어있다는 것만 빼면.

 

 “..뭐야 저거, 진짜야?”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묻는 말에 캐스터는 퍽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깐, 왜 안 웃냐. 그럼 저게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적어둔 거란 말이야?
 캐스터의 반응에 떨떠름한 얼굴로 식당 문을 바라보는 랜서의 옆에서 아처는 흐음 하고 목을 울렸다.

 

 재질은 스케치북. 글씨는 아마도 크레용을 이용해 작성한 모양이다. 사용한 종이와 필기구로 유추할 수 있는 범인은 몹시 한정적이다. 그 중에서도 사람의 출입을 막는 결계를 생성할 수 있는 서번트라면 아마도 하나.

 

 “이건 또.. 흥미롭군.”
 “이게?”

 

 [순걀결안하면지나갈수업ㅅ는문]

 

***

 대체 너서리 라임과 그 나잇대의 꼬마 숙녀들이 어떤 동화책을 발견해 나이에 맞지 않는 조숙한 성교육을 받게 된 건지는 아직도 원인 불명이었다. 확실한 건 그녀들이 식당 안으로 사라지기 전에 외친 말이 더러운 어른들! 이라는 것 정도다.

 

 “그 녀석, 이상한 책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 알지 않을까? 검은 수염이란 해적..”
 “그 자라면 제일 먼저 문에 희생된 저 덩어리 말씀이시죠?”

 

 키요히메가 옷소매를 코로 가리고 찡그리며 어딘가를 가르키자 단백질 탄 내를 모락모락 풍기는 검은 덩어리가 움찔 떨었다. 저거 사람.. 아니 영령이었군. 
가능성 높은 용의자가 저 꼴이라 그런지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아는 영령도 별로 없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몇몇 서번트와 마스터가 문 안으로 사라지고, 남은 서번트들과 몇몇 칼데아의 직원들이 식당 문 앞에서 서성일 뿐이다.

 

 “순결하지 못한 자가 문을 지나가면 제재가 있는 모양이군.”
 “예에 맞아요.. 후우, 마스터도 참. 제게 한마디 상의 없이 문 안으로 들어가버리시다니.”

 

 아처는 키요히메가 어째서 마스터를 따라 식당으로 들어가지 않았는지 묻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순결이라면 내가 예상하는 그것이 맞나?”
 “아마도 맞을 거에요. 거기에 좀 더 포괄적으로 순결함을 체크하는 모양인지.. 일단 살인, 폭행, 도둑질에 그리고 흠, 어쨌든 경험이 있다면 아웃이에요.”

 

 검은 수염은 ‘본인은 해적질 하면서 단 한번도 겁탈당한적이 없단 말이지요~’ 라고 퍽 자신만만하게 문고리를 잡아당겼다고 한다. 결과는 안사즈에 당한 좀비보다 더 못한 꼴이 되어버렸지만.

 

 결계의 위력을 제대로 입증한 검은 수염 덕분에 분위기는 몹시 어수선하다. 과연 이 강력한 전기가 직류인지 교류인지 파악하겠다는 외치는 사자 머리의 서번트는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 댈 때마다 파직파직 피어오르는 불꽃에 깜짝 놀라 손을 떼어내더니, ‘손을 댈 때마다 전기충격이 오는 것인가? 횟수 제한이 있는 것인가?’ 하며 자꾸만 손을 대고 있었다. 
옆의 아처 녀석도 시험삼아 문고리에 손을 대어 보더니 깜짝 놀라 과장스레 손을 떼어냈다.

 

 “뭐야, 그냥 정전기 같은데 엄청 깜짝 놀라네.”
 “아니. 아마 조금만 더 오래 손을 대고 있었다면 순식간에 한쪽 팔 정도는 숯덩어리로 만들었을 거다. 지금 이건 단순한 경고야.”
 “흐으음.”

 결계를 살펴보겠다며 자릴 옮긴 캐스터인 나를 비롯해 대부분의 마술계 영령들은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진지하게 토의하고 있었다. 호기심 때문인지 중간중간 용기내어 문고리에 손을 올리는 서번트들 덕분에 결계는 바쁘게 불꽃을 튀기고 있었고 그 옆에선 서로 자신의 일화를 이야기하며 과연 자신이 순결하지 않은지에 대해 서로에게 검증을 받고 있었다. 도떼기 시장이 따로 없을 소란스러움이었다.

 

 “에우리알레 양과 스테노 양, 그리고 서방님까지 식당 안으로 들어가버리셨어요. 일단 아이들을 달래본다는 하셨는데 언제나 나올련지.”

 

 한숨을 포옥 쉬는 키요히메는 누군가의 핏방울이 묻은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안 그런 척 하지만 퍽 초조한 얼굴이었다. 마스터가 어서 꼬맹이들을 설득해 나오지 않으면 저 부채에 맺힌 핏방울의 다음 주인공은 불쌍한 꼬맹이들 중 하나가 될 게 분명했다.
너서리 라임, 그 귀엽고 대하기 곤란한 꼬마 아가씨는 캐스터로써의 실력은 꽤 뛰어난 편이지만 밖에 있는 서번트들도 유수의 마술사들이다. 분명 머지 않아 이런 귀여운 결계 따위는 금새 파훼당하겠지.

 

순수하고 순결한 소녀만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건 좋지만 하필 식당이라니.

 

 ‘밥은 먹고 싶었던 건가?’

 

 어린아이다운 천진함이다. 
 아처는 어쩐지 퍽 진지한 눈으로 번갯불이 튀는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름대로 마술에 일가견이 있어서인가 지금이라도 문을 해부해보기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이다.
 
 아처는 저 불꽃이 위험하다고 했지만 자신이 볼 땐 손을 댈 때마다 정전기가 튀나 싶을 정도로 약해보였다. 저 정도라면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여는 그 짧은 동안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검은 수염 녀석이야 워낙 손이 시커먼 녀석이니까 숯처럼 구워진 것 같지만, 수많은 사선을 넘어온 전사로써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저건 별로 위험할 것이 안 된다고.
머릿속으로 짧은 계산을 마친 랜서는 어깨를 으쓱 들어올리며 문으로 성큼 다가갔다.

 

 “뭐, 일단 이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거지?”
 “잠깐, 쿠-”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랜서는 문 손잡이를 덥썩 잡아당겼다. 바보 같은! 뒤에서 아처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지만 각오했던 것 만큼 손바닥이 따갑지 않았다. 정확히는, 별다른 감각이 없다.

 

 “......?”
 “어라? 잠잠한데?”

 방금 전까지 노란 번개를 뿜어내던 문고리는 그의 손에서 순한 양처럼 잠잠해졌다.

 

 흰 사자 머리의 서번트가 포효하며 드디어 횟수가 다 찼군! 이라고 문고리에 손을 대자 강력한 번개가 뿜어져 나온 것을 보아 결계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랜서는 비명과 함께 나동그라진 에디슨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처를 보고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 올렸다. 뭐, 손 하나쯤은 각오하고 문을 열어볼까 했는데 잘 됐네.

 

 “말도 안 돼..”
 “안에 들어가서 상황 좀 보고 올테니까 기다려.”

 

***

 “여, 역시 빛의 왕자..!”

 

 누군가가 그렇게 외친 사이 열린 식당 문틈 사이로 그가 사라지고 문이 닫힌다. 아처는 그제서야 자신에게 와닿는 다른 서번트들의 시선을 느끼고 쩍 벌어졌던 입을 간신히 다물었다. 

 

 순결이라니.. 쿠 훌린에게 순결이라니..?

 “어.. 음.. 빛의 왕자를 정말 아껴주고 있나봐?”
 “아..! 맞다. 둘이..”
 “크흠, 어.. 어른이라도 진도는 천천히 나가고 싶을 수도 있지.”

 

 아처는 주변에서 수근거리는 다른 서번트들의 오해를 바로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바로 한시간 전까지 이 손아귀에 잡혔던 얇은 허리와 흰 엉덩이는 모두 허상이었나..?

 

 섹스하지 않은 것을 순결이라 한다면 자신과 랜서는 식당에 오기 직전까지 서로의 순결을 잔뜩 더럽히고 오는 길일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수없이 품어온 몸은 아일랜드의 빛의 왕자가 아니라 대체 누구란 말인가..? 

 

 ‘설마..’

 

 아처는 자신이 디딘 땅이 맨틀까지 푹 꺼지는 듯한 감각에 텅 빈 동공을 격렬하게 떨었다.
범속한 인간이 얼마나 그를 범하든 신의 핏줄을 이은 반신의 순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것인가..? 

 

 “아하. 알겠다.”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은 아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캐스터로 소환된 쿠 훌린의 목소리였다.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 주변에서 떠들던 목소리들이 갑자기 열 배 정도 왁자지껄해진다.

 

 “어, 어라! 이쪽의 빛의 왕자도 통과야!?”
 “무슨 짓을 한 거요! 분명 방금 전까지도 결계에 반응이 있었는데!”
 “재정비다 재정비. 비슷한 스킬 있는 녀석 없나? 테스트 좀 해 보자.”

 

 그 혼란 속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만은 또렷하다. 캐스터로 소환된 쿠 훌린조차 저 무시무시한 순결의 관문을 통과했는지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음? 통과했다고?

 

 “핫! 됩니다! 문고리에 반응이 없어!”
 “하긴.. 순결이라 해도 어린아이의 시점에 맞춘 것이겠지. 괜히 어렵게 생각했던 건가.”
 “약화 해제 스킬 없는 녀석들은 마르타 옆으로 가!”

 

 약화 해제 스킬을 이용한 직후라면 문에 드나들 수 있다는 맹점을 발견한 캐스터 쿠 훌린 덕분에 식당 문 앞에 모여있던 영령들은 하나둘씩 식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문 앞에서 길게 줄을 선 다른 서번트들과 달리 소금기둥처럼 뻣뻣하게 선 아처의 머릿속은 혼돈으로 걸쭉하게 물들어갔다. 그러니까.. 랜서가 결계의 영향을 받지 않은 건 여기 오기 직전에 쓴 그 스킬 때문이란 말이다. 그럼 확실히 자신은 랜서의 순결을 더럽혔을까..?

 

 “아까는 괜한 오해를 해서 죄송했습니다. 직전에 약화 해제를 쓰실 정도로.. 크흠, 흠.”
 “......”

 

 은근하게 자신을 바라보며 식당 안으로 사라지는 서번트의 뒷모습을 보던 아처는 말없이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수치스럽다.. 방금 전 자신도 모르게 떠올린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다. 이대로 칼데아 어딘가에 있을 쥐구멍으로 몸을 구겨넣고 싶다는 격렬한 욕구에 아처는 신음했다.

Chastity.jpeg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