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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ility

글 : 망령 / 그림 : 신조​​                       겸손

 @C_lanCer_1 / None 

 연비가 좋은 것도 이럴 때는 단점이라, 난전 끝에 뻗어 버린 랜서는 그리 오래지 않아 깨어났다. 아처와 랜서가 마스터에게 불려 가기도 금방이었다.


 뜻밖에도 마스터는 둘이 왜 싸웠는지를 묻지 않았다. 그 대신 두 서번트의 부상을 입은 육체는 물론이고 정신의 상태까지에 대한 걱정과 잔소리와 그 목불인견의 싸움을 지켜봐야 했던 자신의 신세에 대한 한탄과 약간의 화와 비난이 섞인 일장연설을 하고는, 마치 아이들의 싸움을 중재하는 보호자처럼 ‘싸웠으니 화해하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그런 뒤 그녀는 두 서번트를 한 방에 밀어 넣었다. 친절하게도 다과까지 함께였다.


 “아, 맞다. 수호자네 뭐네 하는 소릴 들었는데…… 그럼 영령이 아니냐?”
 

 죽일 듯이 공격을 퍼부어 댄 쿨란의 맹견은 어디 가고, 마스터가 챙겨 준 쿠키를 으적거리던 랜서가 물었다. 아처의 기억이 마스터에게 꿈의 형태로 전달되고, 다시 마스터를 통해 랜서에게 전해지다 보니 정보의 양은 몰라도 질은 썩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 편법이 아니고서야 이 비천한 몸이 어찌 얼스터의 빛의 왕자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겠나.”
 “또 꼰다. 보통 이럴 땐 그 수호자란 게 뭔지를 설명해 주지 않냐? 그 쓸데없이 긴 말 중에 정보가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어.”
 “실례. 대영웅께서 흥미를 가지실 만한 이야기가 아닐 것 같아서. 허나 영광인걸, 대영웅께서는 과연 그릇도 크시지.”
 “오지랖 넓단 얘기 독창적으로 하려고 애쓴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처음 듣는 소릴 하는데 안 궁금하겠냐?”
 “미끼를 잘 무는군. 이거 낚시꾼보다는 낚이는 쪽이었나?”
 “아, 말하기 싫으면 싫다, 내가 좆같으면 좆같다고 똑바로 말하고 꺼져.”

 

 벼린 칼날처럼 푸른 머리의 남자는 무기도 없이 무기만큼의 형형한 투기(鬪氣)를 피워 올렸다. 붉은 옷의 남자는 눈썹 하나 끔쩍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영령이 아니라곤 할 수 없다. 영령이면서 수호자이기도 하고, 세계와 계약해 수호자가 되지 않았다면 영령도 될 수 없었겠지. 영령으로 남을 만큼의 강함도, 신비도, 신앙도 없는 범부(凡夫)일 뿐이니.”
 “새끼, 답잖게 빼기는. 자꾸 빌빌거리는데 내 마창을 보고, 그 이름을 듣고서도 살아남은 게 몇이나 될 것 같냐. 네놈이 너를 어떻게

 

 평가하든지 알 바 아닌데, 내 창의 격까지 떨어뜨리는 건 두고 못 본다.”
 

 이미 그 창에 한 번 죽었지만. 아처는 굳이 덧붙이지 않기로 했다. 그는 서번트로서의 자신과 벌인 전투를 말하고, 자신은 수호자가 되기 전의 죽음을 떠올린다. 어찌 보면 이 창병이 그때의 ‘그’와 자신을 가장 잘 구분하고 있지 않은지.
 

 “말을 끝까지 들어. 높으신 분이라 참을성이 부족하신가?”
 “지금 네놈을 한 대 치지 않을 만큼의 참을성은 있다만?”
 “윤허하신다면 이야기를 이어가겠나이다.”

 

 아처가 제 가슴 위로 손을 짚고 허리를 숙였다. 과장되게 저를 낮추는 말투와 동작에 랜서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구릿빛 입술이 맺혀 있던 미소를 지우고 말을 이었다.
 

 “사후를 수호자로서 세계에 내어 주고 나는 힘을 얻었다. 그전의 나였다면 구할 수 없던 사람들까지 구해 낼 수 있을 만큼의.”
 

 행복했지. 덧붙인 말은 들릴 듯 말 듯 희미했다. 마주한 붉은 눈은 그 주인의 창처럼 곧고, 다음 말을 기다리듯 그저 고요했다.
 

 “비웃지 않는군.”
 “힘을 원하는 인간이야 많이 봐 왔으니까. 왜, 비웃어 주랴? 그런 취향이야?”

 

 붉은 눈이 장난기를 담아 가늘게 휘어졌다.
 

 “뭐어, 그런 이유는 처음 보긴 했다.”
 “날 때부터 모두 가진 왕자께서야 이해하기 어려우시겠지만.”
 “한 번만 배배 꼬면 그 혀를 쭉 늘려서 두드려 펴 준다.”

 

 아처는 대꾸도 종전과 같은 너스레도 없이 하던 말을 이었다.
 

 “이 손이 닿는 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구했다고 자부한다. 사후를 걸 만한 가치가 있는 힘이었지. 실로 인간 이상의―”
 “힘이고 그 정신머리고 둘 다?”

 

 농담처럼 던진 랜서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흰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내려왔다.
 

 “그 때문이었던 모양이군.”
 “뭐가?”
 “동료였던 이들의 고발을 받아서 처형당했거든. 그때부터 수호자 일을 시작하게 되었지.”
죽었다는 말을 정성스럽게도 한다. 배반도 간계도 죽음도 익숙한 일이다. 가엾다는 사치스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래, 감정의 낭비이니 사치일 수밖에 없다.
 “세계씩이나 돼서, 힘을 쪼잔하게 줬구만. 애매하게 강하면 그래. 통수를 쳤을 때 몇 배로 갚아 줄 만큼, 다신 일어날 수조차 없을 만큼 뭉개 버릴 수 없으면. 두려워할 만큼은 강했지만, 그 두려움에 압도될 만큼은 아니었나.”
 “이제 와서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고민해 봤자 아무 의미 없다. 어쨌거나 나는 사람들을 구했으니까. 교수대에 목이 매달릴 때까지도 후회는 없었지. 그리고 죽어서도 인간을 구하고 지킬 길이 예비되어 있었고 말이다.”

 

 징글징글한 새끼. 평범이란 단어한테 사과해라. 말을 끊기 싫어 삼킨 말이 혀끝까지 차올랐다. 애써 다른 말, 아무래도 좋을 말을 꺼냈다. 그 바람에 아처의 말끝에 맺히는 냉소를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서 수호자 일은 잘 하고 계시고?”
 

 대답은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새로이 입수한 정보들을 수용하고 정리하느라 분주했던 탓일까, 평소의 랜서라면 눈치 챘을 아주 짧은 휴지(休止) 역시 간과했다. 
 

 “수호자가 일이 없기를 바라는 쪽이 인류 입장에선 좋겠지.”
 “그래? 인간을 지킨다더니?”
 “수호자란 건 인간이 인간을, 세상을 멸하려 할 때 인류의 지속을 위해 불리지. 무슨 수단을 써서든 인류를 존속시키는 게 일이다.”

 

 말하는 얼굴도 목소리도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서, 말하는 내용도 무심히 지나칠 뻔 했다. 
 

 “야, 잠깐. 인간이 멸하려 하는 걸 막는다면―”
 “이해가 빨라 좋군. 수호자는 인간의 존속을 위협하는 인간을 제거해.”

 

 허, 기가 차서 웃음이 났다. 인간을 살려 보겠다고 뒈진 뒤를 저당잡혔더니 바로 그 인간들 손에 죽고, 죽어서 수호자가 된 뒤에는 인간을 죽이러 다닌단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이딴 일을 겪으면 심보가 저 지경이 될 수밖에. 물론 여기에 이해 같은 간지러운 말을 붙일 생각은 없다. 그냥 그 인과가 파악이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수호자가 현계하는 건 세계가 인간의 손에 멸망할 위기에 처했을 때뿐이다.” 
별 것 아닌 이야기지. 덧붙이며 아처가 말을 맺었다. 꺼끌거리는 것은 속인지, 입 안인지. 
 “겸손이 지나치구만.”

 

 제 입이 뱉은 단어에 랜서가 진저리쳤다. 겸손? 저 놈이랑 겸손? 받아칠 말을 장전하듯 빙글거리던 얼굴이 답했다.
 

 “그렇게 따지면 빛의 왕자께서 운명하시던 순간도 지나치게 겸허하지 않았나?”
 “말 돌리는 꼬라지 봐라.”

 

 아처는 흥미롭다는 듯 제 턱을 매만지며 랜서를 훑어보았다. 금속성의 시선이 푸른 예장 위로 흘렀다.
 

 “영령으로서 차고 넘칠 신분과 능력으로 경애와 숭앙을 받은 삶이었지. 고국의 가장 날카로운 창이자 방패였으며, 그 목숨은 고국과 운명을 같이 했다. 모든 명예와 힘을 잃고, 비참한 패자가 되어.”
 “햐, 이딴 식으로 먹이네.”

 

 그래야 네놈답지. 머릿속에 떠오른 쓸데없이 근지러운 말을 집어치웠다. 
 

 “전사가 뒈질 자리가 편안하고 깨끗한 침대겠냐? 긍지도 명예도 없는 놈이라 모르나 본데-”
 “그릇이 크다는 말은 취소다. 오래 담아두시는군.”

 

 오고 가는 말들이 누그러뜨린 분위기에 날이 섰다. 발끈하며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양 가무잡잡한 얼굴 위로 웃음이 피었다. 그 웃음이 랜서의 속에 불을 지폈다. 혀가 칼을 뱉었다.
 

 “수호자 좋아하네, 인류 쓰레기 처리반이지.”
 “부인할 수가 없는걸.”

 

 죽을 때가 됐나 보다. 아까부터 안 하던 짓을 다 하고. 대놓고 저를 부정하는 소리를 해도 하던 대로 배배 꼬인 장광설을 늘어놓기는커녕 어깨를 으쓱하며 웃는 꼴이 한층 더 속을 긁었다. 
 실로, 인류의 존속을 결정하는 오만이 수족으로 부릴 만한 물건이지.

 

 “난 뭘 걸어도 그렇게는 못하겠다. 징그러운 놈. 그 빌어먹을 세계란 것도 그래. 갈 때 되면 가는 거지. 굳이 청소부까지 마련해 가면서 구차하게…….”
 “역시 반신이시라 인간이 살고자 하는 발버둥은 그저 우습기만 한가?”

 

 차가운 금속 같던 목소리에 드물게 노기가 실렸다. 제게 향하는 적의도 걸어오는 싸움도 피하는 법이 없던 영웅은 이를 도리어 기꺼워했다. 
 

 “그 소리가 아니잖아, 멍청한 놈. 영령 몇이 뒤 닦아 가면서 살려 놓는 중풍 환자 같은 세계가 정말로 ‘살아 있다’고 생각해? 지키려면 인간들 스스로 알아서 하든가,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세상이 너처럼 스스로 싸울 수 있는 자들뿐일 것 같나?”
 “그래서 네놈은 그 스스로 싸울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싸웠나?”

 

 잘 나불대던 입이 드물게 닥쳤다. 아픈 곳을 찔린 모양이다. 살아서는 몰라도, 수호자로서는 그 반대였을 테니. 랜서는 마스터로부터 흘러들어온 기억의 잔해를 머릿속에서 털어내었다. 
 

 “그렇다면 너는 무엇을 위해 싸웠지?”
 

 혀가 길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놈치고는 짧고 궁색한 반격이었다. 
 

 “알 바냐, 거기 적이 있어서 싸웠고 싸울 만해서 싸웠지. 까놓고 말해 거기다 대고 정의네 뭐네 할 염치는 없다.”
답은 그의 창격만큼이나 망설임이 없었다. 

 

 “―허무하군.”
 “야, 적어도 너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니다?”

 

 받아치는 랜서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마찬가지야. 살아서건 죽어서건, 네가 어쩌고 있든 내가 할 말은 없어.”
 

 빡치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야. 랜서는 아까의 ‘개싸움’을 애써 뇌리에서 지웠다.
 

 “무슨 말을 한들 바뀔 것이며―” 
 

 이미 정해진, 돌이킬 수 없는 세계에의 예속도. 초개처럼 저를 버려 인간을 구하고자 했던 비틀린 신념도. 
 

 “내가 평한다고 네놈이 듣긴 하고?” 
 

 사족처럼 붙인 말이 경쾌했다.
 

 그 찬란한 삶의 궤적에 비하여서는 허망하기까지 한 말로. 그럼에도 한 점 미련도 후회도 없는 저 눈빛 앞에, 천착하던 무엇이 있던 자들 중 그 누가 당당할 수 있을까.
 

 사랑도 이상도 명예도 무엇도 얽맬 수 없어 고귀했던 생 앞에서는 너무나도 겸허하여.
 

 “―하, 고장난 시계도 하루 두 번은 맞는다던가.”
 “또 뭐라고 씨부리냐?”
 “어떻든 세계의 목숨을 붙여 놓아야 인간도 살아남겠지. 내가 하는 일은 그뿐이다.” 

 

 재수 없게 꼬고 늘린 말을 할 여유가 돌아온 모양이다. 인류라. 랜서가 중얼거렸다. 
 

 “그럼 너는? 그 모든 인간들 다음이냐?”
 

 아처는 대답 대신 웃었다.
 

 네 말대로라면 나는 모든 인간 아래 가장 낮은 자이니. 태양처럼 고귀하고 유성처럼 덧없는 왕자에게 경배를.
아처가 머리를 숙였다. 궁병의 손이 소파 위에 올라와 있던 창병의 발을 조심스레 받쳐 들었다. 발끝까지 무장하여, 나무처럼 대지를 딛고 바람처럼 대지를 달리고 칼날처럼 매섭게 적을 걷어차 날리던 발이었다. 입술에 닿는 금속의 질감은 차갑고, 피를 닮은 맛이 났다. 

 

 “…….”
 

 무슨 짓이냐고 웃어넘기거나 그대로 차 날려버리기엔 아처의 태도는 의식처럼 경건해서, 랜서는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서도 아처가 하는 대로 두었다. 호구(護具)를 착용한 발 위로 입술이 내려앉는 감촉이 느껴지는 것은 이 육신부터 갑주까지 모두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랜서는 먼저 했던 생각을 정정했다. 겸손하지, 그럼. 저를 지독히도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이만큼 겸손한 놈이 또 어디 있을까. 자신을 이루는 전부나 다름없던 이상에게 배반당하고, 비어 버린 자신을 피를 토하는 자기부정과 모순으로 메웠다. ‘자기를 부정함’이 ‘자기’라면, 그것을 뉘가 감히 부정하랴. 걷어차 주고 싶은 흰 머리통을 이번 한 번만은 참아 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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