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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dness

글 : 한먀스               ​​                       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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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훌린은 창문과 문을 번갈아 바라봤다. 벌떡 일어서서 몇 번 교실을 왔다 갔다 움직였다가 자리에 쪼그려 앉길 반복했다. 결국은 의자에 앉아서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지만. 이윽고 눈을 깜빡이다 결론을 내렸다. 간질간질하게 숨을 막듯이 찾아오는 감각은 분명히 질투였다. 물론 여기까지는 가볍게 생각하고 아 질투였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다. 문제는 질투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질투는 남을 부러워하는 감정이다. 쉽게 비교되는 예시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던가 다른 사람에게 잘해주는 일이 있다.

 그렇기에 쿠훌린은 고민에 빠졌다. 에미야를 부러워한 적은 없는데 도대체 왜 질투를 느끼는 건가? 하는 근본적인 궁금증 때문이었다. 애초에 에미야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하나부터 열까지 부딪혔다. 사소한 식습관도 그렇고 생활 반경도 그렇다. 자유롭게 지내는걸 좋아하는 쿠훌린 입장에서는 섬세하고 예민하며 반듯하게 지내는 에미야가 이해되지 않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둘 사이에서 수없이 싸우고 다툰 일이며 이제는 어느 정도 선을 지킬 수 있게 된 문제다.

 이렇게 다르고 함께 지내온 시간도 상당해서 이제 와서 질투라니? 라는 생각이 들었다. 쿠훌린은 생각의 흐름을 바꿔서 언제 숨이 막힐 듯이 간질거렸는가를 생각해봤다. 방과 후 책상에 엎드려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게 퍽이나 마음에 들어 쿠훌린은 책상과 한 몸이 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은 에미야가 쉽게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곤란해 하면서도 최대한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을 넘지 않게 지킨다는 점이다. 그런 사람이 유독 쿠훌린의 일이 걸리면 곤란해 하던가 부탁을 쉽게 거절했다. 우선순위에 쿠훌린이 있다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 마냥.

 그렇지만 최근에는 그런 게 없어졌다. 쿠훌린과의 약속은 지키지만 그전에 약속이 있다며 거절할 때도 늘었고, 이에 따른 핑계는 축제 준비라던가 학생회 일을 도와야 한다던가 같이 다양했다. 같이 있는 시간이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로 줄었다. 오늘도 점심시간 때 같이 점심을 먹지 않고 에미야를 찾는 곳에 찾아가 도움을 줬다. 물론 에미야가 자신의 몫으로 싸온 도시락은 맛있었다. 그렇지만 내심 앞에 놓인 빈 의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따뜻하게 쏟아져 내리는 햇볕에 쿠훌린은 몸을 늘어뜨렸다. 서늘하게 뺨에 닿는 책상과 대비되는 온도가 마음에 들었다. 허리를 조금 빼기 위해 뒤로 의자를 무르니 쇠 긁는 소리가 났다. 평상시라면 신경 쓰지 않을 소리지만 복잡한 생각에 날카로워진 지금은 기분을 떨어뜨리기에 충분한 자극이었다. 번갈아 한쪽 볼을 부풀리길 반복하다가 후 하고 숨을 뱉었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쿠훌린은 책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지개를 펴고 해가 지고 있는 창 밖을 봤다. 운동장에서 에미야가 급하게 뛰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질투했네."

 입 밖으로 말을 내뱉으니 더욱 선명하게 와 닿는 감정이었다. 쿠훌린은 가볍게 찾아오는 기시감을 딱히 알아차릴 생각은 없었지만 오늘 수 차례 뿌려진 에미야의 무차별적 친절과 그에 따른 끊임없는 고찰로 결론을 내렸다. 쿠훌린은 에미야가 곁에 없는 것이, 타인에게 친절을 뿌리고 다니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보란 듯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에미야의 행동은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도. 유독 저에게 더 친절하게 굴었던 것이 갑작스럽게 멈춰버리니 마치 닭 쫓던 개가 된 꼴이었다. 그럼에도 에미야가 싫지 않고 그의 시선이 닿은 이들이, 친절을 받고 있는 이들이 질투 난다는 것은 뻔한 결론이지 않겠는가?

 

 쿠훌린은 자리에서 일어날 때 뒤로 밀려난 의자를 곱게 책상 밑으로 집어넣었다. 이번에도 의자가 끌리며 쇳소리가 났지만 아까 전의 쇳소리와 다르게 경쾌하게 들렸다. 그와 동시에 교실 뒷문이 열렸다.

 "빨리 왔네."

 "예상보다는 늦었지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딱히? 뭐, 미안하다면 오늘 저녁은 네 집에서 얻어먹고 가고 싶은데?"

 당황이 스쳐 지나가는 얼굴이 보였다. 노을 때문인지 열심히 달려와서 그런 건지 귀 끝과 목덜미가 붉어진 에미야가 보였다. 몇 번 숨을 고른 에미야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상당히 곤란해졌을 때 저런 표정을 짓곤 하는데.

 "오늘은 곤란하군. 대신 내일 점심도시락을 원하는 걸로 준비하겠다."

 "그래. 그럼 고기가 가득한 도시락으로 준비해줘."

 "그렇게 하도록 하지."

 참 우직한 대답이지. 사람이 한결같기 만도 저만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쿠훌린은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가방을 집어 들었다. 에미야는 급하게 뛰어오느라 흐트러진 옷맵시를 정리했다. 다시 단정한 모습으로 돌아온 에미야에 쿠훌린은 입술을 삐죽이듯 웃었다. 시간이 적게 들던 많이 들던 확인해야 할 것이 생겼다. 확인하고 나면 이 모든 것이 끝나겠지. 그렇다 한들 끝은 또 다른 시작이리라. 목표가 생기면 느긋하게 사냥할 수도 있고 저돌적으로 물어뜯을 수도 있다. 감정을 자각하고 나니 찝찝하던 기분이 맑게 변했다. 질투하면 어떤가, 좋아하면 어떤가. 쿠훌린은 자신이 있었다. 에미야가 저를 좋아하게 만들 자신이.

***

 

 계절 중 꽃이 피고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녹음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봄은 변덕스럽기 그지없다. 에미야는 아침에는 살을 찌르듯이 추웠다가도 점심쯤이면 여름같이 후덥지근해지는 날씨에 소매를 걷어 올렸다. 두텁게 입은 패딩이 한 순간에 필요 없는 것으로 전락해 버렸다. 하교할 때쯤이면 분명 그 유용성이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 지금만큼은 정말 무거운 짐이다. 그리고 가까운 거리에서 계속해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쿠훌린도 지금은 짐이라고 생각된다. 쓸데없이 빨라지는 고동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에미야는 변덕스러운 날씨만큼이나 변덕스러운 쿠훌린 덕분에 하루하루 스릴 넘치는 기분을 맛보고 있다.

 "불만이 있다면 제발 말로 해."

 "그건 네가 스스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루하루가 심장 떨리는 나날의 연속이라 에미야는 걱정 섞인 말을 내뱉었다. 그에 쿠훌린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곤 대답했다. 그리고 묵묵히 밥을 맛있게 먹을 뿐이었다. 여전히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에 슬쩍 눈을 굴리면 역시나 이쪽을 보고 있는 쿠훌린이 보였다. 잠깐이라도 눈을 마주치면 심장에 해로운 미소를 남발하며 에미야를 쳐다봤다. 같이 지내는 시간에 만족하자고 자기고찰을 끝낸지 며칠도 안됐는데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생겼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지낸 시간도 길다.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같은 나이, 같은 동네, 같은 학교, 같은 시간을 살아왔고 기억의 파편도 비슷한 점이 많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많은 점이 다르고 그 중에서 에미야가 쿠훌린을 좋아한다는 점은 확실하게 달랐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쿠훌린은 에미야를 친구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을게 뻔 하기에.

 

 에미야는 어쩌다 쿠훌린을 좋아하게 된 건지에 대해 수많은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그 원인을 알아내려 할수록 눈앞에 당장 보이는 쿠훌린이 좋아졌다. 이유는 없고 어느 순간부터 그저 좋아졌다. 살면서 이렇게 격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는 에미야는 순식간에 감정에 물들었다. 푸른빛의 머리칼과 호탕한 웃음소리, 자유분방하면서도 책임은 지는 단단한 부분. 분명 예전에는 이런 점으로 싸우고 어쩌면 혐오하기 까지 했었다.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상대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에미야군 이것 좀 도와줄 수 있어?"

 "아. 그러도록 하지."

 방과 후 하교시간에 복도에서 찾아온 부탁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서서히 붉게 익어가고 있을 뒷목과 귀를 상대적으로 차가운 손으로 식혔다. 여전히 시선은 떨어지지 않는 것 같지만, 적어도 신경을 돌릴 거리를 찾았으니 그것으로 됐다. 에미야는 어떻게 보면 구원에 가까운 부탁이었다며 성심성의껏 부탁을 들어줬다. 여름에 있을 축제준비를 벌써부터 하는 학생회를 생각하면 안쓰러운 마음에 어쩔 수 없이 들어줬던 일이 많다. 그래 그리고 이상을 느낀 것도 그때부터지. 에미야는 반으로 나눈 종이뭉치를 들고 복도를 걸었다. 속죄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각별한 자기검열과 그에 따른 기이한 희생정신이 필수적으로 따라온다. 이런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그저 살아갔지만 쿠훌린과 수많은 다툼 속에서 겨우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평생을 살아온 생각이 쉬이 고쳐지지는 않지만. 이는 쿠훌린의 자유분방한 정신과 정반대이면서 같은 속성이니 알고도 넘어갈 일이다.

 그런 에미야지만 유독 쿠훌린의 일에 한해서는 무언가가 달랐다. 기이한 희생정신도 수많은 자기검열 속에 생긴 철저한 이성도 다 의미 없어진다. 베푸는 것에 익숙해졌고 바라지 않는 삶을 살던 에미야는 원하는 것이 생겼다. 욕심을 부리고 어쩌면 집착과 질투도 했다. 쾌활한 성격과 시원시원한 행동은 가만히 있어도 빛나는 사람을 더욱 멋있게 만들었으므로. 쿠훌린의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생각의 끝에서 에미야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 쿠훌린이 멋지다고 인정하는 걸 보면 확실히 뭐가 단단히 잘못 되도 잘못된 거라고.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했고, 경악하면서도 좋아해버렸다. 종이를 운반하고 고장 난 기계를 고쳤다. 적당히 돌려 거절했을 일을 쿠훌린을 좋아한다고 자각한 후부터 수락했더니 하루에도 여러 번 이런 요청이 온다.

 모든 일을 끝내고 반으로 돌아오니 뚱한 표정의 쿠훌린이 에미야를 반겼다. 에미야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쿠훌린의 변덕적인 행동이 평상시에 없던 것은 아니었다. 즉석에서 결정해버리는 일도 많았고, 그에 휘둘린 적도 많았다. 그렇지만 겨우 좋아하는 감정을 갈무리하며 차분히 가라앉혀놓고 있는 중인 에미야에게 갑작스럽게 선을 넘어오는 쿠훌린의 행동은 쉽게 감당할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을 유혹하고 자극하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친밀감을 넘은 행동을 하는 쿠훌린은 정작 저보다 더 평화로워 보였다. 에미야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환하게 웃는 미소에 하루에도 몇 번씩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기분이었다. 평화와는 이미 훨씬 먼 나날을 살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 쿠훌린의 평화로운 모습과 상반되는 행동은 독이나 다름없었다. 하루라도 편히 심장이 뛰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이러다 심부전이라도 오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찰해야 할 정도였다.

 "시로."

 

저렇게 죽어라고 안 부르던 이름을 부르는 것도 그렇다. 무덤덤하게 대답하려고 해도 분명 목소리의 끝이 떨리겠지. 이런 동요를 아는지 모르는지 웃고 있는 쿠훌린이 야속할 지경이다. 조금만 기다려 주면 감정 정리를 완벽하게 끝내서 평소와 같은 친구로 지낼 수 있었을 건데 왜 그렇게 선을 넘어오는 건지. 에미야는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

 

 분명 맞는 것 같은데 말이지. 쿠훌린은 무덤덤하게 대답하는 에미야를 보며 생각했다. 벌써 2주일이 지났다. 관찰을 거듭하며 반응을 살펴보면 에미야는 분명 쿠훌린을 좋아하고 있는게 맞았다. 일부러 틈을 벌려서 비틀어놓은 일상에 흐트러지는 반응을 볼수록 정해놓은 정답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내심 쿠훌린은 자신만 좋아하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점에 기분이 좋았다. 순조롭게 친구에서 연인으로 흘러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저 우직한 성격과 꽉 막힌 부분은 어디 가지 않는 건지 오랜 시간 지낸 쿠훌린이 아니면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티가 나지 않았다. 분명히 좋아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뭐가 문제인 걸까.

 턱을 괴고 빤히 에미야를 바라봤다. 어두운 피부라 쉽게 티가 나지 않지만 점차 열이 오르는 게 보였다. 정확하게는 귀와 뒷목에 손을 가져다 대는 모습을 보고 추측하는 것뿐이지만. 눈을 마주치는 순간 흔들리는 동공과 미세하게 올라가는 입 꼬리를 보면 분명히 이건 가설도 추측도 아니라 사실이 맞는 것 같다. 여전히 타인에게 베풀어지는 친절은 마음에 안 들지만. 쿠훌린은 돌아오는 에미야에게 부러 감정을 실어 이름을 불렀다. 이미 교실은 텅 빈지 오래고 이곳에 있는 사람은 쿠훌린과 방금 돌아온 에미야 뿐이니 문제 될 것도 없다. 저 담담한 표정 뒤에 뭘 숨기고 있는지, 무엇이 감정을 틀어막고 있는지 뻔히 보이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쿠훌린은 가득 부풀어 오른 풍선을 숨기고 있는 사람을 바늘로 툭 건드릴 준비를 마쳤다.

 "시로. 할 말 없냐?"

 "전에 얘기한 불만 얘기인 건가."

 담담하게 내뱉어지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참으로 불친절하지 않은가. 멋대로 쿠훌린은 에미야의 행동을 그렇게 정의 내렸다. 그래 질투가 났던 근본적인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것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저에게 가장 친절하면서도 이런 부분에 한해서는 불친절하기 그지없는 에미야의 태도가. 에미야가 가장 솔직하게 챙겨주고 신경 쓰고 있는 건 쿠훌린이지만, 가장 솔직하지 못하게 행동하는 것도 쿠훌린이다. 그 점이 계속해서 걸렸던 것이다. 이제 고민하던 문제도 정답을 찾았으니.

 "답은 찾았어?"

 "솔직하게 대답하자면 못 찾았다. 여러모로 생각해 봐도 이유를 모르겠더군."

 "그럼 힌트를 줄까?"

 "힌트?"

 "아주 큰 힌트야. 너와 나 모두에게 필요한."

 짙은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검은 색이 물든 눈이 쿠훌린을 담았다.

 "너 나 좋아하지?"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실시간으로 변해가는 표정을 통해서 대답을 들었다. 에미야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를 가장 잘 알고 있기에 이 한 문장은 정말로 큰 힌트가 됐다. 여태까지 고생한 나날이 허탈해질 정도로 간단명료한 끝이었다. 숨기려고 했지만 이미 쿠훌린은 다 알고 있었던 걸까. 이렇게 직접적으로 치고 들어오는 것도 쿠훌린이라서 가능한 거겠지. 하루라도 심장이 안전한 날이 없는 것 같다. 생각의 흐름이 팽팽하게 돌아가다가 결국 정지했다. 에미야는 깔끔하게 두 손을 들었다.

 "좋아한다. 쿠훌린."

 깔끔한 인정 끝에 뱉어진 대답은 충분히 마음에 드는 답이었다. 혹 여나 여기서 부정할까 내심 걱정했었던 쿠훌린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해 시로."

 에미야의 깔끔한 인정에 쿠훌린은 더 이상 말을 꼬지 않았다. 분명 질탄 어린 말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질끈 감았던 눈이 떠지고 믿기지 않는 다는 표정으로 에미야는 쿠훌린을 바라봤다. 그 동안의 고생은 뭐였는가 싶을 정도로 경쾌한 대답이었다. 헛웃음이 나오고 혹시 서서 꿈을 꾸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깔끔한 대답이었다. 이런저런 말을 할 것도 없었다. 에미야는 곧바로 쿠훌린의 손을 잡았다. 말로는 절대 표현할 수 없는 긍정적인 감정이 속에서 휘몰아 쳤다. 쿠훌린도 마음에 든다는 듯이 에미야의 손을 맞잡았다. 서로 다른 체온이 비슷해 질 정도로 말없이 손을 잡고 있던 둘은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저녁에는 축배라도 드는 게 어떨까?"

 "미성년자는 술 마시면 안 된다고 누누이 얘기 했을 텐데."

 "에이 그렇게 굴지 말고 서로서로 좋은 일인데."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곧 바로 말다툼이 반복된다. 고백을 했더라도 서로 이제부터는 사귀는 사이가 되더라도 이런 것만큼은 바뀌지 않는다. 그렇지만 손에서 느껴지는 체온과 입가에 머무는 웃음기는 분명 앞으로의 일상의 변화를 보여주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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